HRDK HIGHLIGHTS HRDK와 함께한 사람들

HRDK와 함께한 사람들

한국산업인력공단 40년의 빛나는 역사를 기념하며

소방안전교육사 자격 취득의 목표를 이루다!
제가 취득한 자격증명은 소방안전교육사입니다. 사실 소방안전교육사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자격증은 아니었습니다. 이 자격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거의 소방관분들로, 예방안전과에 근무하시는 경우 필요한 자격이기에 자격의 응시 범위가 국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응시 요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교육학을 이수한 경우 자격에 응시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저 또한 응시 자격이 충족되었기에 소방안전교육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경험과 성장을 나누는 귀중한 기회
저는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자격의 취득을 권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조금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안전교육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육을 바로 소방안전교육사가 담당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낱 개인으로서는 이것을 도무지 홍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주최하는 국가자격 취득자 수기공모전을 접하게 됐습니다. 공모전 참여를 결심한 저는 그저 이 자격을 취득하면서 생긴 스스로의 변화를 그대로 기술했습니다. 소방안전교육사 저서를 집필하고, 여러 소방학교 외래 강사로 위촉되기도 했으며 한국교육시설안전원의 안전패널로 활동하기도 했거든요.

지칠 때마다 다시 꺼내 보는 그때의 열정
현재는 수기를 적던 시기의 모습보다 진일보한 소방안전교육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부총리상을 받고 안전체험관들의 운영을 자문하기도 했으며 미국 화재폭발조사관(NAFI-CFEI)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으니까요.
이러한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소방안전교육사 전문자격 취득이었습니다. 저에게 생긴 변화의 바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어넣어 주고 싶었으며 동시에 치열했던 내 삶의 기록을 세상의 한 공간에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종종 저는 책장에 꽂힌 국가자격 취득자 수기공모 우수사례집을 꺼내어 그 시절 나의 모습, 그리고 나란히 실려 있는 열정 넘치는 다른 수상자들의 이야기를 읽어봅니다. 현실에 지쳐 차가워진 마음이 다시 열정으로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거든요.
이처럼 유익한 사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기회, 그리고 멋진 추억을 선물해준 한국산업인력공단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도전의 서막,
Grand Hyatt Banquet Server

어느 날 학과 게시판에서 우연히 K-Move 안내문을 보며 영어 전공 인문계 전문대생으로 평범한 나의 이력이 화려해질 기회를 만났다고 직감했다. 영어권 국가이면서 비교적 짧은 비행거리와 서양인에게 주눅 들며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되는 곳, 싱가포르만큼 적합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었다.
공단과 함께한 싱가포르 호텔 취업 프로그램으로 영어 면접 준비와 호텔 인턴십 외에도 여름방학을 이용해 영어캠프 봉사활동과 해병대 캠프, 10km 마라톤도 참여했다. 한양여대 K-Move 호텔리어 프로그램을 마치고 싱가포르에 도착해 처음 마신 공기는 독특했다. 지금은 너무 반가운 냄새지만 그때는 집을 떠났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냄새였다. 외국에 자리를 잡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든든한 동기들과 함께하니 직장인이 되어서도 계속 학교에 다니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싱가포르 5성급 호텔, 그랜드 하얏트. 나와 몇몇 동기들은 연회장에 배정되었다. 연회장은 호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 있는 업무다. 행사에 맞춰 공간과 장식을 결정하고 오디오, 조명, 식음료 메뉴 등을 정하고, 손님 맞이와 마무리 정리까지. 어제는 스탠다드차타드의 VIP 초청행사, 오늘 오전은 일본 분재협회 사모님들의 자선행사, 저녁에는 브랜드 론칭 파티. 프라이빗 다이닝을 선 보이던 나의 직장 생활. 그러나 파티가 끝난 뒤 허무함이 찾아오듯 잘나가던 연회장에 비수기가 찾아오고, 상대적으로 바쁜 업장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당시 우리가 다른 업장(레스토랑)의 유니폼을 입고 구내식당에서 슈퍼바이저들을 만나면 그들의 미안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나 호텔에 남의 일이란 것은 없었다. 호텔 전반에 걸친 업무 경험은 인재로 성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호텔리어에서 승무원의 길로
업무에 적응함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한 생각이 들던 차, 같이 살던 친구와 여행을 다녀왔다.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여행은 당시 내 상황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돌연 호텔리어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5성급 월드 와이드 호텔에 몸담았었다는 어쭙잖은 패기로 한국식 호텔 업무환경에 타협하고 적응하지 않겠다며 다른 길을 찾았다. 취준생이 된 2013년도에 싱가포르의 생활을 곱씹으며 중국어를 배울 걸, 호텔리어로 더 성장할 걸, 편입해서 일과 공부를 잡을 걸 하는 자책도 있었지만, 다시 해외취업이 가능해지면서 가끔 한국에 돌아올 수 있는 외국항공사 승무원의 길에 우연히 들어서게 되었다.

사와디캅의 도전, Air Asia
싱가포르 호텔리어의 경험으로 운명의 회사 ‘에어 아시아’에서 1,400명의 지원자 중 최후의 14인이 되었다. 에어 아시아는 2014년 태국 방콕에 ‘타이에어 아시아엑스’를 설립한 후 ‘방콕-인천’ 노선 운항을 맡길 한국인 승무원 직접 채용을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싱가포르에서 친구와 여행을 다닐 때 경비 절감을 위해 선택한 LCC 에어 아시아의 승객 탑승 경험과 동남아시아 근무 경험이 면접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급격히 인상된 연봉과 태국 현지 물가를 고려한 두 번째 해외 생활은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회사는 비용을 아끼지 않고 1기 외국인 크루들을 돌봤고 승무원으로 처음 마주한 세상은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소속감과 커리어에 대한 정체성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게 5년 차 크루가 되어가던 중,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외로움도 커졌다. 5성급 항공사, 중동 항공사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카타르 항공’은 2017년 중동에 고립된 채 살 길을 강구했고 공격적인 마케팅과 채용공고로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줬다. 에어 아시아에 근무하며 이직을 준비하기는 쉽지 않았다. 애정을 쏟은 만큼 헤어지는 기간도 길었다. 이직 준비만 1년 반. 2018년 겨울,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카타르 항공’ 면접에 당당히 합격했다. 고향 같은 존재인 에어 아시아를 뒤로하고 중동으로 날아갔다.

모래사막을 날다(feat. Qatar Airways)
카타르 항공 경력직 신입 승무원. 운 좋게도 교육 감독은 태국인과 결혼한 말레이시아 사람이었다. 나를 위해 세상이 판을 짠 건가 싶었다. 전 직장에서 탄탄하게 쌓은 비행기 기종 및 안전교육은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덕분에 5성급 항공 서비스 교육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 집중했던 에어 아시아와 다르게 전 세계 160개국으로 출근하는 카타르 항공 스케일에 압도당했고 다양한 기종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른에 첫 유럽 땅을 밟았다.
카타르는 전체 인구의 80%가 외국인이라 이곳에서는 이방인이라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회사 내에도 130개국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동료들이 있었다. 비행 내내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다른 세상을 알아가는 이 시간이 소중했다. 다가올 2020년이 정말 기대되는 마음으로 겨울도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코로나19의 일상 침범
그러다 갑작스러운 비상사태에 새로운 형태의 비행을 하게 됐다. 마스크, 장갑, 고글, 일회용 가운과 함께하는 거리두기 비행. 코로나로 나와 같은 입장인 해외취업자와 유학생들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 자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는데 그걸 가장 바로 옆에서 돕는 동료 승무원들의 노고가 크다는 것을 안다. 나도 2020년 4월 싱가포르 비행을 마지막으로 무급휴가를 신청해 귀국했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도 해외취업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 외국인 근로자로서 살아남겠다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던 내가 자랑스럽다. 영어 공부를 위해 선택한 길에서 이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기술까지 습득하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전 세계에 흩어진 친구들과 기원 중이다. 아직 날개를 접을 때가 아니니, 언제 어디서라도 다시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재정비하며 우리를 떠난 여행이, 일상이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마지막으로 공단의 K-Move로 시작되어 대한민국에서 받았던 특혜와 대학의 지원 그리고 나를 지탱하게 해준 지인들의 격려와 사랑의 힘을 세계를 향해 떠나는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베풀고 싶다.

저는 서울 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에서 자동차 정비를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2000년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종합고등학교에 자동차과 교사로 임용되었습니다. 대학에서 배운 전공이 기계공학이라, 교단에 설 때마다 자동차에 대한 지식과 기능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대학 때 취득했던 건설기계설비산업기사와 일반기계기사 자격증이 떠올랐습니다.

기계공학 전공자가 자동차과 교사로 정착할 수 있는 발판
국가기술자격 접수 일정을 살핀 후 자동차정비기사 필기시험에 접수했습니다. 낮에는 자동차정비와 관련된 내용을 교육하고, 밤에는 교무실에 남아 자동차정비기사 필기를 준비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자동차정비기사 필기에 필요한 자동차기관, 자동차 섀시, 자동차 전기 등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할 수 있었고, 한 번에 합격했습니다. 다음으로 자동차정비기사 실기는 학생들과 늦게까지 남아서 준비했는데, 아쉽게도 한 번에 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준비하면 할수록 실기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만 합격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두 번째 시험에서 임의로 고장난 엔진을 수리하고 엔진에 시동이 걸렸을 때 짜릿한 기쁨을 맛보았고, 최종합격을 했습니다. 자동차과 교사가 된 지 1년 반 만에 자동차 관련 기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그 과정에서 공부했던 것을 바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학생에게 인정받는 교사가 될 수 있게 한 자신감
자동차 분야는 계속 발전하기에 발전 속도에 발맞추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처음 자동차 활용법을 가르칠 때는 기화기 타입의 가솔린 엔진에, 제어 방식은 기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전자제어식 엔진으로 교육 내용이 변경되었고, 자동차정비기능사 시험 문제도 최신 기술과 관련된 내용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전기자동차 기술을 넘어 자율주행자동차 기술이 새롭게 등장한 시대에, ‘이렇게 나태한 마음으로 학생들 앞에 서면 안 되겠다.’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른 것은 배제하더라도 자동차 기술과 기능 면에서는 최고의 선생님이 되고자 굳은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을 지키기 위해 자동차정비기능장과 차량기술사 취득을 목표로 공부했습니다. 자동차정비 기능인재반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동차정비기능장 필기에 합격했습니다. 실기 또한 자동차의 구조 및 정비 방법, 회로 분석 및 수리 등을 학생들과 밤늦게 공부하고 훈련하면서 습득했습니다.
그렇게 자동차교사로서 7년 만에 자동차정비기능장에 합격했고, 학생들에게도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도 새 학기에 새로운 교과를 배정받으면 교사로서 모범이 되고자 관련 자격증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런 노력으로 차체수리기능사와 자동차보수기능사를 취득했습니다. 늦게까지 남아 자동차 이론 공부 및 정비 실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도 늘었습니다. 학생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교사로서의 사명을 항상 새기고 있습니다.

차량기술사 도전과 합격이 만든 자부심
‘오리 떼가 나는 것은 그 우두머리의 울음소리 때문이 아니라 우두머리가 먼저 날기 때문이다.’라는 명언을 교직 인생의 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공부해라, 자격증 따라 잔소리를 하기보다는 먼저 도전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각종 자격 취득에 이어 이번에는 ‘선생님이 차량기술사에 도전해보겠다.’라고 학생들에게 선언했습니다. 1차 시험인 논술 형식의 필기시험도 어려웠지만, 기술사 시험 특성상 2차 면접시험은 더욱더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자동차의 설계, 평가, 제작 등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고 공부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2차 시험은 여섯 번이나 불합격의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될 때까지 해보겠다는 오기가 생겼고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최신기술을 공부하고 또 공부하면서 일곱 번 만에 합격의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나약함을 견뎌내야만 했던 인내의 시간이었습니다.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자동차 활용법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기술사 자격증이 필요한가?’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자격증을 공부하면서 자동차의 메커니즘을 바로 알고, 학생들에게 왜 이 기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왜 새로운 기술이 필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어 뿌듯합니다. 이로써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 도움을 줄 수 있어 더욱더 기쁩니다. 2020년에는 지도하는 학생들이 서울시 지방기능경기대회 자동차정비 분야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받으면서, 교사로서의 보람이 크기도 했습니다.
21년 전, 기계공학과를 갓 졸업한 새내기 교사에서 이제는 자동차와 관련된 기술과 기능을 바탕으로 학생들 앞에 당당히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되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 자부심을 느끼는 데는 국가기술자격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선생님처럼 자격증 취득과 같이 새로운 분야에 끊임없는 열정으로 도전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꼭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2006년 2월 한국서부발전에 입사하여 현재 안전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자격 취득으로 취업에 성공한 사례 및 직장 내 업무능력을 인정받은 사례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소방설비기사(기계)로부터 시작된, 힘들지만 뿌듯했던 취업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선택과 집중
2004년 지방대 화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담당교수님 소개로 소방시설공사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처음 소화기 점검만 하다 아파트에서 배관 피팅, 펌프 동작테스트 등 공사 보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결한 배관에 수압을 걸어보고 조립한 펌프도 돌려보는데 흥분되고 짜릿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인근 가스공사, 발전소에서도 소방 보조일을 하면서 나도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 당시에도 취업은 힘들었습니다. 안전 관련 자격증인 소방설비기사(기계)와 가스자격증은 반드시 취득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영상 강의를 수강하면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화학은 전공이라 금방 이해하고 암기했지만, 문제는 기계였습니다. 두 번 낙방 후 이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때맞춰 가스 관련 공기업에서 채용공고가 떴습니다. 밤잠 설치면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필기전형을 대비해 화학전공책과 가스자격증책을 여러 차례 봤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를 믿고 노력한 결과 1차 필기전형, 2차 논술 및 인·적성검사를 거쳐 3차 면접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면접시간이 끝나고 정중히 인사하고 나오는데 직감적으로 ‘아, 떨어졌구나!’ 싶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첫술에 배부를 수 있냐 위로하듯 수없이 되뇌며 창가 너머 붉은 노을을 멍하니 봤던 기억이 납니다.

희망적인 소식에 도전을 계속하다
며칠을 낙담하는데 뉴스에서 흘러나온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다시 작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참여정부가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해 수도권 인구과밀 현상을 해소하고 낙후한 지방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을 목표로 공공기관 지방 이전 계획안을 발표했습니다. 앞으로 공공기관 채용 시 연령이 폐지되고 관련 자격증 취득 시 학력 규제가 완화됩니다.”
“관련 자격증 취득 시 학력 규제가 완화됩니다”라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기계 분야 역학책들을 들춰 보았습니다. 그렇게 기계 분야의 생소한 역학들을 6개월 정도 부단히 공부해 일반기계기사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실기시험을 준비하던 중 한국○○ 채용공고가 떴습니다. 기계 관련 자격증 취득 시 기계직군에 응시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련 자격증에는 소방설비기사(기계)가 없었습니다. 혹시 누락된 게 아닌가 희망을 풀고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돌아오는 답변은 ‘저희 사규에는 소방설비기사(기계)는 기계 관련 자격증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였습니다. 너무나도 큰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한 줄기 빛이 된 첫 자격증, 소방설비기사(기계)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서부발전에서 채용공고가 떴습니다. 관련 자격증에 소방설비기사(기계)가 있었습니다. 시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그렇게 1차 필기전형 및 일반상식, 2차 논술 및 인·적성검사를 통과하여 3차 면접만을 남겨두었습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자리에 앉으니 가운데 면접관이 자기소개서를 유심히 보더니 “어! 화학과 졸업했는데 기계직군으로 지원했네요” 먼저 질문을 하셨습니다. 속으로 쾌재를 외쳤습니다.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로 소방시설 공사를 했는데 펌프를 분해하고 배관 피팅을 하다 보니 저의 적성에 기계가 더욱 맞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발전소에서도 소방일을 했는데 발전설비와 배관이 혈관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유체와 화학물질이 주입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화학과 기계를 두루 공부한 바탕으로 업무를 더욱더 잘 습득하고 적응해서 회사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소 담대하게 대답하자 면접관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비전공자라는 '약점'은 오히려 현재 나의 '큰 강점'이 되다
그렇게 2년 반 정도 취업 준비 기간을 거쳐 한국서부발전에 입사했습니다. 그러나 회사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비전공자로 기계직군으로 입사해서인지 기계 업무에 역량이 떨어질 거란 무언의 선입견도 있었고, 근무하고 싶은 희망부서 배치에 여러 번 미끄러지는 등 좌절을 경험하였습니다. 회사에서 나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곰곰이 고민하면서 화학, 기계뿐만 아니라 전기를 두루 공부하여 안전관리자로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 산업안전기사를 취득했습니다. 이후 안전조직이 재편성되면서 태안발전본부 내 안전팀장으로 발령받게 되었습니다.
현재 사업소 내 법정안전관리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근무하면서 협력업체들과 소통과 토론 중심의 안전교육 시행, 안전시설 보강 및 제도개선 등에 힘씀으로써 지금까지 담당 사업장에서는 큰 재해가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업무역량을 향상하고자 주말마다 고용노동부에서 지원하는 한국기술교육대학원 안전환경공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무엇보다 2020년 초에는 제120회 기계안전기술사와 제67회 위험물기능장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처음 취득한 소방설비기사(기계)가 막막했던 취업이라는 어둡고 긴 터널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되었고, 안전업무를 담당하면서 공부하여 취득한 기계안전기술사나 위험물기능장은 광활한 대양을 항해하는 데 내비게이션 같은 역할로써 실질적인 안전업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국가기술자격은 업무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앞으로 더는 불행한 재해가 발생하지 않는 사업장, 나아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회사를 구현하기 위해서 안전업무의 외길 인생을 달릴 것입니다.

동아리에 활기를 불어준 관광통역안내사
‘전쟁으로 황폐했던 나라가 순식간에 발전했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 ‘한국의 경제구조 변화와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이유를 알게 되어서 신기했다’, ‘엄청 재미있었다.’ 학생의 ‘엄청 재미있었다’라는 말만큼 교사에게 성취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또 있을까? 지루하기 짝이 없던 나의 동아리 시간은 적정 인원을 넘겨 더는 받아줄 수 없을 만큼 학교에서 인기 있는 동아리가 되었다. 이 모든 마법은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만난 순간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었다.

쳇바퀴 같은 일상
중·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한 지 정확히 10년이 되자 권태감이라는 단어가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능 이후 3학년의 영어 시간은 거의 빈 교실에 대고 라디오 틀어놓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놀렸다가는 바로 ‘수업권을 침해했다’라는 민원이 들어온다. 영어 수업시간에도 이런 식인데 하물며 평가에 반영되지 않는 동아리 수업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통상 학교에서는 교사들에게 교사 본인의 과목 특성에 맞춘 동아리를 개설하길 원한다. 이러니 영어 교사인 나의 선택지 자체는 그리 넓지 않았다.
그러던 중 중등학교 영어 교사 경력이 관광통역안내사 영어시험을 대체할 수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자격증 취득을 위한 노력
그때부터 과감히 서점에서 필기 문제집을 구매하고 독학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는 오답 노트 만드는 작업을 반복했다. 만드느라 얼마나 가위질과 풀칠을 많이 했는지, 손아귀에 물집이 잡히기도 했다. 물론, 이건 내가 문제를 많이 틀린 탓에 정리할 게 그만큼 많아서였다. 그렇게 필기 공부에 지친 와중에, 국내여행 안내사도 동일한 필기시험을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공부하는 거 국내여행안내사도 따자는 마음에 용감하게 자격증 두 개를 한꺼번에 접수했다. 당일 오후 가채점 결과가 합격선에 든다는 걸 알게 되면서, 실기까지 붙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명색이 영어 교사인데, 영어로 말하는 시험을 포기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 는 일이었다. 학생들이 어려워 할 때 나도 이렇게 극복했다고 할 만한 성공담이 있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실기까지 시간은 너무 촉박한데, 양은 많고 그렇다고 전부 모범 답안을 외울 수도 없는지라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반드시 정보를 외워야만 하는 문화유산, 의견을 묻기도 하는 관광지식, 절차를 알아야 하는 가이드 실무 등으로 주제를 분류해서 말하기 양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 수첩에 주제와 키워드를 적은 뒤 약 두 달간 틈만 나면 말하기 연습을 했다.

문화홍보대사반 동아리 창설
우여곡절 끝에 관광통역안내사와 국내여행안내사를 모두 취득하자 열심히 공부했던 걸 그냥 썩히는 게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동아리를 만들었다. 서울 시내의 문화유산에 대해 학습하고, 학습한 내용을 영어로 외국인에게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아리다. 학생들이 동아리에 가입하면, 가장 먼저 대한민국의 기초정보를 영어로 배우게 된다. ‘역사나 한국지리’, ‘일반사회’ 등의 과목을 통해 부분적으로는 배우지만, 막상 대한민국의 인구·면적, 길이와 같은 정보나 공휴일, 화폐의 인물 및 도안 등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것을 영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는 더욱 모르기 때문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이런 걸 훨씬 궁금해 하는데도 말이다. 다음엔 대한민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대해 영어로 배우게 된다. 우리나라에 세계인이 인정하 는 문화유산이 많다는 데서 학생들은 벌써 놀라는 눈치다.

실습을 위한 문화유산 탐방
이렇게 기초지식을 쌓은 후 문화유산 탐방에 나선다. 다행히도 학교가 서울 강북에 있어 창덕궁, 종묘, 정릉 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도 근방이고 서울성곽은 걸어서도 갈 수 있다. 아울러 인사동, 북촌, 익선동, 서촌 등의 관광지가 가깝다. 학사일정에 따라 다른데, 시간이 여유로울 때는 지하철을 타고 코엑스와 선정릉, 봉은사, 롯데윌드까지도 탐방한다. 탐방 전에 학생들은 영어로 문화유산 소개문을 써보고, 문장을 수정하여 돌려주면 돌려받은 소개문을 들고 탐방하며 본인이 느끼고 경험한 대로 소개문을 고친다. 그리고 완성된 소개문을 연습하여, 나중에는 실제로 외국인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영어로 문화유산을 소개할 수 있도록 한다.

코로나19로 찾아온 동아리 위기!
2020년 초, 코로나19라는 불청객이 우리나라를 찾아왔고 탐방이 주된 활동이던 나의 동아리도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온라인 영상 수업에 맞추어 동아리 구성을 바꾸었다. 탐방을 할 수 없는 큰 제약이 생겼지만, 그 대신 서울 이외의 지역에 있는 문화유산까지도 학습에 포함할 수 있었다. 그간 몰랐는데 문화재청, EBS 등에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을 정교하게 소개한 영상 자료가 놀랍게도 많았다. 그래픽태블릿과 전자펜 및 녹화 프로그램을 구매하고, 문화유산 설명 영상을 촬영하고, 탑재한 뒤 초조한 마음으로 수업 반응을 기다렸다.
반응은 정말 좋았다! 이 글 첫머리에 나열된 문장들은 현재 온라인 동아리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반응이다. 학생들은 정말 고맙게도 온라인으로도 우리나라의 관광자원에 대해서 즐겁게 학습하고 있었다.

풀뿌리 외교관 길러내는 것이 목표
이처럼 관광통역안내사는 나에게 혁신적인 동아리 운영을 가능케 해주었다.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은 질곡의 세월을 거쳐 오면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학습했던 장소들을 기억하여 방문했으면 좋겠다. ‘그래, 그때 이러이러한 점에서 가치 있다고 했지’하면서 내용도 되새기고,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 외국인들에게 다가가 자랑스럽게 우리의 위대한 유산을 소개하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능력 있는 ‘풀뿌리 외교관’을 길러내는 것이 내 국가자격 취득의 최종목표이다.

사회복지사, 내겐 맞지 않는 옷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라는 글자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기관에 어필할 만한 대외활동도 없었고 학점이 특출하게 좋은 편도 아니었기에 취업 강사와의 1:1 면담에서 자꾸 어깨가 좁아졌다. 내 태도가 애매하다고 생각했는지 강사는 취업할 생각은 정말 있는 거냐고 재차 물었지만, 쉽사리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 사회복지학과 학생이었다. 매년 캠퍼스에는 졸업한 선배들의 공무원직 합격 플래카드가 걸렸다. 하지만 나는 졸업에 필수인 두 번의 기관 실습을 마치고 나니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이 내게 맞지 않는 옷임을 깨닫고 말았다. 당시 나의 나이는 25세였고,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 결코 늦은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과감히 사회복지사의 길을 뒤로 하기로 했다.

뜻밖의 권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니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에 공감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대부분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 아깝지 않으냐는 반응이었다. 한 친구가 내 고민에 대해 진지하게 들으며 자신의 취업 스토리를 이야기해 주었다. 친구는 내게도 용접사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권했다. “내가 평소 여자치고는 거친 면이 있지만, 무리가 있지”하고는 돈은 많이 벌겠다 하니 친구가 용접사의 평균 일당을 알려주었다. 개인 역량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기본 일당이 꽤 높은 편이었다. 친구는 꼭 건축현장이 아니어도 철강, 제조업 공장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용접기술이 두루 쓰인다고 덧붙이며 국비 지원과정도 알아보면 코스가 다양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도 본격적으로 특수용접 기능사 자격증을 딸 계획이라고 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나의 마음에 어느샌가 ‘용접사’라는 단어가 꽉 채우고 있었다. 그날부로 나는 용접사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용접사가 되는 법이나, 용접사가 취업할 수 있는 분야나 전망 등에 대해 다각도로 조사했다.

용접사 무료지원 교육과 한 달간의 실습
친구는 특수용접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폴리텍대학교의 특수용접과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동아줄을 잡은 것처럼 폴리텍대학교 특수용접과에 지원서를 냈고, 합격하여 1년 동안 용접 이론과 실습수업을 수료했다. 전체 인원 60여 명 중 5명만이 여성이었다(이것도 보통 때는 2, 3명에 그친다고 했다). 처음엔 용접 스패터가 튀고 왱 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그라인더에 지레 겁을 먹기도 했으나 차근차근 따라하니 아주 어려운 점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척척 가스절단을 해내고, 용접기에 달린 아르곤가스통을 능숙하게 교체하게 되었다. 그렇게 1학기가 끝나고 짧은 여름 방학 때 나는 교수님의 소개로 기업체에 나가 한 달 동안 실습했다. 그곳은 압력용기, 열교환기 등을 생산하는 업체로 특수용접으로 분류되는 아르곤용접 및 로봇 플라즈마 아크용접까지 두루 쓰이는 곳이었다. 용접 팀장님은 실습생인 나에게 조언과 기술 전수를 아끼지 않으셨고, 한 달의 짧은 실습이 끝났을 때 나는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하던 대학교 4학년 때의 모습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졸업 후 취업
그곳에서 만난 나의 남편은 지금도 종종 그때 이야기를 한다. 열심히 눈을 빛내며 수업을 듣던 내 모습이 참 보기 좋았고, 자신에게도 많은 자극이 되었다고. 나는 그렇게 특수용접과의 1년을 누구보다 값지게 보내며 특수용접기능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지금도 종종 힘들 땐 그때를 생각하면서 내게 허락되지 않은 일은 없다고 되뇌며 힘을 얻곤 한다. 나는 특수용접학과 교육 이수 중 여름방학에 실습했던 기업과 인연이 되어 졸업 후 입사하게 되었다. 비록 지금은 이직했지만, 마지막엔 직접 로봇용접기를 조종하여 가장 핵심이라 부를만한 열교환기 뱅크 몸체의 용접을 하기도 했다. 남편 역시 특수용접기능사 및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취업에 성공했고, 그때 만났던 친구들은 우리에게 ‘부부 용접단’이라는 귀여운 별명을 붙여주었다.

내가 본 에메랄드빛 희망
용접을 할 때 쓰는 용접 면에는 흑유리가 끼어 있다. 용접할 때 발생하는 밝은 빛을 포함한 대부분의 가시광선을 차단해주는 물질로, 용접부위를 제대로 관찰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다. 금속을 녹이기 위해 가하는 아크의 온도는 순간적으로 3,000°C까지 올라간다. 거의 태양의 흑점에 가까운 온도다. 그 부분을 용접면을 쓴 채 흑유리를 통해 보면 밝은 에메랄드빛으로 보인다. 결함이 없는 용접을 하려면 그 부분을 잘 보며 용융 풀(용접할 때 아크열과 용적 따위로 인해 움푹 파이는 곳)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매일 그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을 보며 종종 나는 태양에 가까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때 어떻게든 전공을 살려 취업해서 사회복지사로서 현장에 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즐겁게 일을 하려 하겠지만 계속되는 스트레스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맞닥뜨리는 고충을 내게 토로할 때면 나는 그들에게 묻곤 한다. “너도 특수용접기능사 한 번 따볼래?” 이 한 마디가 예전 방황하던 나에게 동아줄처럼 내려왔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이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에메랄드빛 희망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자격증으로 한국요리교실을 열다
“마사랍(masarap)”, “얀(yan), 까야(kaya)!” 일요일 오후 필리핀 사람들과 한국 요리 수업으로 김치를 만들던 날, 담근 김치를 먹으며 여기저기서 즐겁게 외치던 말입니다. “마사랍(masarap)”은 필리핀 말로 ‘맛있다’란 말이고 “얀(yan), 까야 (kaya)”는 필리핀 말로 “그래 할 수 있어!”라는 말입니다.
저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교사입니다. 대부분 필리핀 외국인 근로자들로 구성된 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몇 년째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나 음식에 대한 체험 수업을 하던 중 필리핀 노동자들이 한식을 요리하는 데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국에 돌아가서 한국 음식을 만들어 식구들에게 소개한다거나 한국에서 자주 먹었던 음식이라서 그곳에서도 만들어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교사인 제가 한식을 제대로 배워서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침 집 근처 안산여성인력센터에서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반이 개설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처음에는 요리 순서와 정해진 시간 안에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색했지만, 함께 연습하던 수강생들의 열의와 더불어 요리 선생님의 열정 덕분에 유익한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요리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요리 수업을 마친 후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조리 방법을 익히면서 요리 실력을 연마했습니다.
드디어 시험을 보던 날, 조리 도구를 챙겨 긴장된 마음으로 전철을 타고 시험장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이 대기실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과 남자분들이 많이 계셔서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늦은 나이에도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도전을 하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시험장에 들어가서 출제된 요리를 조리하여 시간 안에 제출하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고, 시간이 흘러 합격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조리기능사> 자격을 기반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요리교실을 개설했습니다. 이후 안산시에 다문화 동아리 지원사업에 응모했고, 시로부터 비용을 지원받아 한국요리교실을 열어 매월 1회씩 20여 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한식을 체험하도록 하는 요리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잘 몰랐던 필리핀 사람들의 음식 취향
수업 주제는 ‘김치 만들기’, ‘닭찜’, ‘부대찌개’, ‘추석 음식(전)’ 등 한식 중에서도 필리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메뉴를 선별했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에는 한국 사람들과 다른 여러 특징이 있습니다. 김치는 먹지만 매운 김치를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더운 나라에 살지만, 냉면, 콩국수 등 차갑게 먹는 국수는 먹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름이면 즐겨 찾는 냉면도 잘 먹지 않습니다. 주로 육식을 즐기며 소고기보다는 돼지고기, 닭고기를 좋아합니다. 대체로 음식을 짜게 먹는 편이며 특히 단 음식을 매우 좋아합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자신들이 근무하는 회사 식당에서 나오는 채소와 나물 종류는 잘 먹지 않는 편이라서 먹을 것이 한정적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특징을 고려하여 한식의 양념을 조금은 덜 맵게 구성했습니다. 인도에서 온 근로자들도 몇 있는데 이들은 매운 음식을 잘 먹기 때문에 한국 사람보다 더 맵게 고춧가루나 청양고추를 추가하기도 합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보통 4년이 넘는 시간을 한국에서 지냅니다. 오랜 시간 한식을 먹다 보니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서도 한식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김치 만들기 수업 날, 며칠 뒤 필리핀으로 돌아갈 때 가져간다며 한 수강생이 자신이 만든 김치를 꼼꼼히 싸고 있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만든 김치를 가족에게 먹여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필리핀에서도 한국김치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센터를 거쳐 간 필리핀 외국인 근로자 중의 한 명은 가비테라는 지역에서 김치를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나라 식당에 한식 메뉴를 추가하거나 한식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사업을 통해 그들이 가족의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새로운 대안도 꿈꿔봅니다.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으로 주고받는 행복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을 취득하고 나서 이처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식을 세계화하고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을 취득하였기에 꿈꿀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자격증이 없이도 한식을 가르칠 수는 있지만 시나 도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을 하는 데는 자격증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한식을 배우고 돌아간 외국인 근로자들이 건강에도 좋고 유익한 한식을 소개하며 한류 전도사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맛있는 요리를 함께 만들고 나눠 먹는 즐겁고 유쾌한 추억을 얻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기회가 주어진다면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식자격증반을 개설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를 통해서 외국인들도 한식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익혀서 한국 사회에 장기적으로 정착하거나 현지로 돌아가 한식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격증은 따기는 힘들지만, 자격을 얻고 나면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시작 : 마음을 움직이는 일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생활하다가 한국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외국인이라 마음에 차지 않으셨고, 시누이가 4명이나 되는 집안에, 장남의 아내로 추석 때마다 음식을 하는 힘겨움도 컸다. 그러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가기만 했다.
그럼에도 일은 끊임없이 했다. 처음에는 공장에서, 이후에는 노인요양보호사, 코웨이 코디까지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찾지 못했다. 30대 초중반이었던 나는 어느덧 40대가 되었고, 점차 가정이나 친척과의 관계도 안정이 되고 나니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새로운 길을 내어보고 싶다’,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하루, 서점으로 가서 관광국사, 관광개론, 관광법규, 관광자원해설에 대한 책을 모두 구매하고, 관광통역 안내사 모의필기시험을 치를 수 있는 교재, 2차 면접 예상질문집과 같은 책들을 다량으로 구매했다. 바리바리 무거운 책을 집으로 가져오면서 자격증을 취득하기로 결심했다.

도전 : 실패에 따른 성공
관광통역안내사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언어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 필기에 응시해야 한다. 필기시험 과목은 근현대사를 포함한 국사, 관광자원해설, 관광법규, 관광학개론으로, 이중에서 ‘국사’의 배점이 40%, 나머지 과목이 각각 20%씩 60%를 차지한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한국어와 자신의 언어(자격증)를 이용한 문답형식의 인터뷰가 이루어진다.
모든 것이 어려웠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자격을 취득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1년을 독하게 공부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필기시험에 통과했다. 공부해온 시간을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면접에서는 탈락했다. 변명을 하자면 고사장의 영향도 있었다. 부산에서 학원을 다니고 창원에서 공부했으나 고사장을 서울로 택하면서, 낯선 도시에서 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서울 관광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잘 하지 못했고, 특유의 분위기에 기가 눌렸다. 당시에는 너무 아쉽고 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잘된 건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좀 더 탄탄한 지식을 쌓아갈 수 있었다.

과정 : 그림을 그리듯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어렵기만 했던 과목들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그 비결은 ‘공부하는 법’에 있었다. 활자를 마냥 외웠던 옛날과는 달리 관광지마다 깊이 파고 들어가며, 배워가는 쾌감을 느꼈다. 몰랐던 한국의 음식, 건축, 관광지, 문화재, 하나하나 들여다 보니 모든 곳에 이야기가 있고 역사가 있었다. 과목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공부한 내용이 이해되고 즐겁게 느껴지니 자신감이 저절로 생겼다. 필기도 면접도 처음처럼 떨지 않았기에, 면접관의 질문에 공부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차분히 대답했다. 그렇게 두 번째 도전에서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지금 : 익숙했던 것들이 특별해 보이는 마법
지금은 프리랜서로 관광협회의 일들을 꾸준히 해나가고, 교육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학습의 목적도 있지만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문화재나 관광지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 즐겁다. 평소에 지나쳤던 한국의 모든 것은 무엇 하나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단아하고 소박하면서 그 속에 씁쓸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 한층 더 아름다워 보였다. 강대국 사이에서 이만큼 성장한 나라, 케이팝이나 드라마로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나라. 관광통역안내사 공부는 내게 익숙한 것들이 특별해 보이는 마법을 선사해주었다. 내가 지금 밟고 있는 땅에 대한 사랑을 찾고,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미지근하고 답답한 여름에 부슬비가 내리는 것처럼 마음속에 조용한 평화가 내려앉았다.
자격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결과만을 쫓아가다가 어느새 목적지를 잃고 만다. 열매가 맺어지기까지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수록 그 맛은 모든 것을 보상해주듯이 달콤하고도 포근하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흔히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기회는 여러 번 찾아온다고 한다. 나에게 있어 그 여러 번 중 한 번의 기회는 우연한 만남에서 왔다. 졸업한 지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사무실로 고등학교 동창생이 찾아오면서 내 머릿속의 평온하던 균형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연한 만남, 도전정신의 도화선이 되다
학창시절 그 친구는 나와 성적뿐만 아니라 운동과 인기투표 등 많은 부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좋게 표현하면 친구고 나쁘게 표현하면 원수 같은 동창생이었다. 간간이 들리는 소식으로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선 궁금해 하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20년 만에 만난 동창이, 그것도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던 동창생이 관리소장이라는 직함을 당당히 내세우며 내가 경리로 근무 중인 사무실에 인사하러 들어오는 순간, 운전 중 낯선 길을 헤매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먼저 알아보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반갑다 친구야’라는 의사 표현은 했지만, 지금에 와서 그때의 내 모습을 회상해보면 덜 익은 감을 씹은 듯 떫은 표정과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손만 겨우 내밀어 악수를 청했던 것 같다.
동창생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본인 스스로가 친구 앞에서 얼마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을까? 내가 느끼는 기분과는 정반대었을 것이다. 7년 전만 해도 아파트에 여자 소장은 흔하지 않았으며, 급여도 당시 여자 회사원들보다 2배 이상으로 높아 그 당시 경리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 동창은 직장생활 중 경리로 재직하다 주택관리사를 취득해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관리소장으로 부임한 경우였다. 순간 얄미웠다. 아니 부러웠다는 말이 맞겠다. 관리소장이라는 직업에 대한 막연한 선망에서,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란 도전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년 6개월의 노력이 빛나던 순간
주택관리사 시험에 대해 많이 검색해보았으나, 섣불리 도전하기에는 과목 수도 많고 공부 양도 상당했다. 공부할 환경 또한 최악이었다. 남편은 금융업 특성상 잦은 야근으로 얼굴 보기도 힘들었고, 늦둥이인 딸아이는 겨우 다섯 살로 한창 엄마 보살핌이 필요해 야근이 없는 아파트 경리로 근무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왔는데…….
하지만 동창생과의 그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내 생각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왕에 시작한 사회생활, 하고 있는 일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 보자.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나는 우선 남편에게 지금 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요일을 정해 당번으로 아이를 돌보기로 했고, 6년 동안 다니던 배드민턴 새벽 운동 모임도 당분간 접으며 훗날을 기약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나이 들어 사서 고생한다는 둥, 외벌이도 아닌데 그 돈 벌어서 다 뭐하려고 청승이냐는 둥, 시험이 어려워 죽어라 고생만 하다 포기할 거라는 둥…. 하지만 난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고, 결심한 날 곧바로 인터넷 강의 1년분을 신청해버렸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하지 않게 한 달 치 월급을 일시불로 송금하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20년 넘게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온 나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아이가 어려 집에서 공부하기엔 집중이 되질 않았고, 나는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도서실을 찾아보기로 했다. 의외로 시에서 운영하는 도서실과 대학교에서 24시간 운영하는 도서실이 많았다. 마음만 먹으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음에 감사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열정적이고 열심이었던 것 같다. 퇴근 시간은 6시, 저녁 먹고 아이들을 챙기고 도서실에 도착하면 오후 8시부터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도서실은 24시간 개방되어서 새벽 서너 시까지,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 외에는 절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공부했다. 3시간 가량 자고 일어나 출근하는 일을 반복했다. 기본강의 → 심화강의 → 문제풀이강의 → 모의고사강의로 다섯 과목의 시간표를 정해 정말이지 하루도 쉬지 않고 1년 6개월을 공부한 결과, 제12회 주택관리사에 합격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고마운 존재, 국가기술자격증!
합격의 기쁨도 잠시, 관리소장이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이력서를 열 통, 스무 통 제출하여도 면접조차 보지 못하는 곳이 더 많았다. 나는 이번엔 아파트와 관련된 국가기자격증을 찾아보기로 했다. 의외로 종류가 많았다. 우선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하는 조경 기능사에 도전했다. 생소한 나무 이름에 당황했을 뿐만 아니라 도면 그리기, 나무 심기, 잔디 심기 등 손재주가 없는 편인 나로서는 힘든 내용이 많았다. 한 달을 매일 8시간씩 도면을 그려, 나는 마침내 조경 기능사에 합격했고 방수기능사에 또다시 도전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방에는 학원조차 없어 서울로 1박 2일 숙박을 해가며 학원에 다녔다. 실기 연습이 조금은 위험하기도 했지만, 무언가 또 다른 일을 시도한다는 것에 대한 설렘이 더 컸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하는 조경기능사와 방수기능사 자격시험에 모두 합격한 후 드디어 나는 관리소장 임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관리소장 합격자 발표를 받은 후엔 그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어 집 안을 깡총깡총 어린아이처럼 뛰어다녔다.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분이었다.
그 더운 여름날 시원한 냇가에 한번 못 가보고 여름휴가 동안 온전히 공부에만 매달렸고, 알록달록 단풍이 물든 가을 산의 유혹에도 어두침침한 도서실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공부했던 기억들에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2년 동안 5살배기 막내딸과 아이들만 챙긴다며, 대체 공부는 언제 끝이 나냐고 툴툴거리면서도 끝까지 나를 믿고 도와준 신랑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엄마 없이도 잘 지내준 아이들에게 고마웠다.
지금은 관리소장으로 인정을 받고 근무하고 있지만, 나는 결코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도전을 계속할 것이다. 내게 있어 한국산업인력공단의 국가기술자격증은 취업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취업에 가장 필요한 스펙이 되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고마운 존재이다.

나는 원래 전문대학에서 게임컨설팅 분야를 전공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깜깜한 채용의 문턱에서 처음 취업한 곳은 조선 업계였다.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하던 중, 철강 분야로 진로 변경을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전공과 무관했던 터라 취업이 쉽지 않았다. 온라인을 통해 관련 업체에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번번이 떨어지기 일쑤. 그러던 중 포스코의 외주 파트너사 ‘세영기업’에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철강 분야에서 성장하고 싶은 마음을 열렬히 표현한 결과, 2014년 1월 꿈꾸던 세영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사 초기부터 업무 적응은 쉽지 않았다. 비전공자로 직무상 필요한 전문 지식 습득의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그때 만난 행운이 바로 ‘일학습병행제’였다. 입사 6개월 차에 ‘일학습병행제 학습근로자’가 되면서 기본적인 개념 습득은 물론, 개인 역량 향상과 경력개발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됐다. 일학습병행제에 참여한 1년간 1,200시간의 교육을 꾸준히 이수했다. ‘철강 분야 명장이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배움이 즐거웠고, 직무 관련 기술 자격증을 10개나 취득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하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며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은 고비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홀로 고민하지 않았다. 일학습병행제 기업현장교사와의 면담을 통해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려 했다. 주요 교육 훈련 분야인 제강 직무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할 경우, 1:1 멘토링을 통해 현장을 직접 방문하거나 1인 지도를 받기도 했다. 조직생활 적응이나 업무 외 애로사항 등도 1:1 면담 요청을 통해 적극적으로 회사에 적응해갔다. CoP 온라인 등록을 통해 스스로 학습시간을 늘려감으로써 개인 비전 달성 기간을 단축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일학습병행제 교육 횟수가 쌓여갈 수록, 회사 업무는 하루가 다르게 익숙해져 갔다. 교육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기업 업무 프로세스 개선에 즉각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회사 내 적극적인 아이디어 제안 또한 상상 이상의 성취를 가져다주었다.

실제로 월 평균 1.2건의 생산성 향상 아이디어를 제안하며, 생산부품 관리 방법 개선에 일조하기도 했다. 이는 회사에 1,800만 원의 비용 절감의 효과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2014년 신입사원 평가 결과 최우수 직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2015년 일학습병행제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는 학습근로자 부문 고용노동부 장관상의 영예까지 차지했다. 회사의 핵심인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일학습병행제는 내게 꿈을 찾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꿈을 향해 쉼 없이 달리는 법을 배웠다. 나는 올해 더 큰 꿈을 목표로 한 발 더 내딛고 있다. 직무 수준을 사내 표준인 3.2에서 3.5로 향상시키겠다는 의지, 그리고 철강 기사·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하고, 철강 산업의 명장이 되겠다는 희망. 뜨거운 꿈을 품고 열렬히 달릴 날들을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