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복의 가치, 신사의 품격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명장 전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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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양복쟁이로 살아온 지 52년이다.

앳된 심부름꾼으로 출발해 대한민국 명장에 오르기까지 요행은 하나도 없었다.

평생 간직하고픈 양복 한 벌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

 

"전병원 패션디자인(양복) 명장에게 신사의 품격이 묻어난다"
 


사는 길은 오직 기술뿐

“집안이 갑자기 기울어 중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광주 충장로 양복점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버티면 고등학교에 진학하리라는 희망으로 책을 놓지 않았죠. 그러다 TV에서 국제기능올림픽 선수단의 카퍼레이드를 마주했는데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전병원 명장이 ‘공부만이 답이 아니다, 기술을 제대로 배우자’라고 마음을 굳힌 순간이다. 열여섯 살에 불과했지만 꿈은 단단했다. 봉제와 재단, 패턴을 차근차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 열정에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통째로 건넨 스승을 만났고, 광주 시내에서 재단사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어느덧 20대에 접어든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어느 날 역삼각형 체형의 보디빌딩 선수가 옷을 맞추러 왔어요. 제 기술로는 패턴이 잘 안 나오겠더라고요. 당연히 안 맞았죠. 제가 체격 탓을 하니 손님이 ‘내 몸이 이러니 맞춤복을 찾지, 변명을 왜 하느냐. 당신은 기술자 자격이 없다’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 길로 ‘사는 길은 기술뿐이다’라는 초심을 잡은 그는 선배들을 찾아 나섰다. 기술 서적을 빌려 복사한 것만 50여권, 기술세미나가 열리는 곳은 어디든 찾아가 맨 앞줄에 앉아 질문을 던졌다. 주말이면 전국에서 옷 잘하기로 소문난 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내 기술을 여기까지이니 더 알려달라는 간곡함을 담았다. 그렇게 전국을 돌며 20여 명의 스승을 만났다.

10년을 미친듯이 기술을 파고든 결과 ‘광주 꼬마’는 훌쩍 성장해 있었다.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 각종 봉제‧패턴‧재단 대회에 도전했고, 최고의 자리를 모두 휩쓴 후에야 자신을 기술인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손님 몸에 70%, 마음에 30% 맞게 옷을 지어요.”
 

개인의 체형이 가장 중요하고, 그밖에 전체적인 분위기, 피부 톤, 나이, 직업까지 두루 고려해야 옷이 딱 맞으면서도 편하고 활동성 좋은 옷이 완성됩니다.

 

전병원 원장은 처음 일을 시작한 충장로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전병원양복점’을 운영한다. 부족함을 채우고 또 채우는 사이 그는 최고가 되었고, 2014년 7전 8기 끝에 명장의 자리에 올랐다. 1993년 그가 주도해 시대별 양복 변천사를 한눈에 정리한 ‘한국양복100년사’ 전시도 특별하다. 온 힘을 쏟아부은 ‘내 일’의 역사를 알고 싶어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좋은 스승에게 많은 걸 배운 만큼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는 꿈, 양복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언젠가 양복박물관을 열고 싶다는 꿈이 더해진다. 연탄 다리미 심부름꾼이던 소년이 대한민국 양복 명장이 되어 옷을 짓는다.
 

기술에 예술을 더한 그의 양복에는 마음을 사로잡는 힘, 근사한 신사의 품격이 담긴다.

 

 

업데이트 2024-10-2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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