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흙을 고루 하여 거친 표면을 깎고 빚어 불에서 하나의 매끈한 도기와 자기를 완성하기까지. 명장은 이 길이 쉽지 않았으나 매 순간 환희에 가득 찬 세월이라고 했다. 3대째 이어온 도예가의 길, 지난해 대한민국 명장에 오르면서 이계안 명장은 비로소 오랫동안 품었던 제 몫을 다했노라 말한다.
도자는 내게 운명이라
경남 고성 와룡산 자락 속 1,000여 평의 부지에 자리한 향림도예원. 이곳에 이계안 대한민국 도예 명장이 있다. 올해로 50여 년이 넘는 세월, 흙과 불과 더불어 살아온 이 명장이 저만치서 느긋하지만 다부진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계안 명장은 무려 열여덟 번의 도전 끝에 2020년,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됐다. 그가 이렇게도 간절히 명장의 영예를 거머쥐고자 한 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이 길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가 컸다. 조부가 옹기를 시작했고, 선친이 다시 이어받아 이 명장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흙과 불, 도자를 접했다. 집안 내력이 그러했고, 무엇보다 그때 그 시절이 그러했다.
“흙이 늘 눈에 익었지요. 우리가 클 무렵에는 해방 이후에 일본 잔재가 남았던 시절이라 땅따먹기를 한다든지, 여자아이들 고무줄을 끊고 도망 다닌다든지, 또 구슬치기가 인기가 있었어요. 흙으로 구슬을 만들었는데, 소죽 끓이는 아궁이에 묻어두면 불이 센 쪽에서는 흙이 터져버리지만, 안쪽에서 굽히는 건 적당한 강도로 구슬이 만들어졌죠. 이렇게 흙을 만지던 게 하나의 길이 되었을 겁니다.”
대대로 땅에서 흙을 얻고, 불을 피워 도자를 구웠지만, 그는 1980년대 충남 부여에서 백제 와당을 연구했고, 서울 ‘요업개발’ 연구실에서 도자 원료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만 해도 규모가 꽤 큰 기업이었다. 이때 원료와 열처리 공정에 관해 전문가로 성장했다. 이후 전통 공예로서의 도자에 다시 눈을 돌려 고향으로 내려와 이곳 와룡산 자락에 자리 잡았고, 대를 이어 전통 자기 제조 기술을 익힌 것이 어느덧 30여 년이 넘었다.
“흙에 대한 애착이 내 몸에 배 있었기 때문에, 계획보다는 ‘운명’이었죠. 군대에서 베트남 파병을 다녀온 3년을 제외하면 이 흙을 절대로 안 놓았지요.”
이 명장은 하루 15~16시간 작품 활동에 주력하며 198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부산, 진주, 삼천포, 고성 등 각지에서 총 21회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자그마한 미술관에서 이루어진 전시도 있지만, 어떤 데는 최소한 60점에서 100점 이상을 준비해야 하니 그 공을 이루 말할 수 있으랴.
한 번 전시를 마치고 나면, 또다시새로운 연구에 몰입해 독특한 기법으로 작품을 드러냈다.
흙과 불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자태
향림도예원 중앙에 자리한 전시실로 들어서자 작품마다 신비로운 자태가 뿜어져 나온다. 순백의 자기부터 화려한 자기까지, 명장에게 어느 하나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 것이 없다.
“이것 한 번 만져보세요. 흙으로 만든 건데도 표면이 이렇게 부드럽습니다. 하지만, 아주 단단해서 쇠보다 더 강도가 높죠. 원료가 어우러지면서 ‘결정’이 생기는데 마치 꽃무늬처럼 아름답죠.”
이 명장의 작품 기법 중 두드러지는 세 가지는 결정, 진사, 삼채이다. ‘결정’은 표면에 변화된 모양을 드러내는 것으로 온도의 변화에 따라 이 결정을 볼 수 있다. 사파이어 결정문, 황금 결정문, 에메랄드 결정문, 다이아몬드 결정문 등 독창적인 이 기법은 유약과 불 조절에 의해 나온 결과다. 이 조절에 의해 화병 표면에 수백 개의 자기 문양이 나타난다.
다음으로 ‘진사’ 기법은 안료에 구리를 넣어 환원염으로 색깔을 내는 것으로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등 강하고 화려한 색감이 특징이다. 그리고 '삼채'는 세 가지 색을 표현하는 것으로, 삼채화병은 우주의 빛깔을 담은 마냥 보는 이의 눈길을 단번에 이끈다.
이곳을 방문한 이들에게 명장은 그 아름다움이 어디서 발현되었는지 상세히도 설명한다. 작품에 대한 숭고한 애착이다.
“옛 중국서 내려온 삼채기법은 저온에서 구워 색깔이 강렬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삼채화병은 고온에서 구워 완전히 자기가 된 상태로, 세 가지 유약이 흘러내리면서 혼합이 되어 이러한 자태를 뽐내죠. 이 작품은 국회 영빈관, 샌프란시스코 동아시아관 등에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 명장은 생활 자기인 접시, 사발, 식초병, 간장병 등 흑도자의 기법을 되살리고자 철이 함유된 황토와 나무 재를 활용해, 흑도와 천목유약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전시실 바로 옆 공간에 ‘흑도자’ 기법 관련 전시실을 따로 갖추었다.
“외국인들이 관람 올 때는 이 흑도자를 꼭 소개합니다. 우리 전통문화를 소개하고, 또 맥을 이어가기 위함이지요.”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관람이 잠정적으로 멈췄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향림도예원은 외국인 관광객이 줄곧 이곳을 찾아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어 왔다.
예술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이룬다
명장은 문화와 명맥을 잇는다는 사명 아래 지금 이 순간에도 지침서가 될 만한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누군가에게 기술을 전수할 만큼 내공이 쌓이기까지, 그는 새벽녘 주변이 정적에 잠기면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까지 달려왔는지 하염없는 생각에 잠기며 세월을 버텨왔다.
“나무에 불을 피고, 다시 한 이틀 불을 때고, 또다시 일주일을 기다리면서 완성된 그릇을 꺼내는 이 공간에서, 어쩌면 최면에 걸려 살았다고 봐야하죠. 내 작품의 8할은 아내의 몫이라고 할 정도로, 모든 일에서 도움을 주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래도 창작의 고통은 오롯이 내가 견뎌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도 단 한 순간도 힘들어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늘 환희에 찬 세월이었다. 그 세월을 견뎌본 자이기에 예술이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결코 단번에 이루는 일은 없다고 말이다.
“여러 가지 원료가 들어가는데, 원료마다 최고의 정점이 있어요. 그 정점 온도에서 불을 끄지 않고 몇시간을 유지하면, 오르내리면서 변화가 나타나면서 결정이 생기죠. 예술도 금방 답이 나오지 않아요. 한 오십은 되어야 그때부터 완전히 자리를 잡고, 눈에 띄고, 작품도 그 위치에 올라가지요.”
덧붙여 여전히 새롭게 하지 않으면 젊은 사람들의 힘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이 명장의 말에 고뇌의 시간이 담긴다. 무엇보다 그 속에는 같은 길을 걸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부단히도 애쓰는 나를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아, 개구리가 잠자리를 잡아먹는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개구리가 물속에 있다가 잠자리가 아래로 오거나 물이 차오를 때 먹거든. 인생도 그래야 하려나. 그렇게 너무 서두르지 말고 갈 때까지만 가거라.’ 하셨지요. 무슨 일이든지 시간에 좌우되지 않고, 차곡차곡 내 노력을 쌓다 보면 늘 답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겠지요.”
현재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이 명장은 앞으로의 길을 고민한다. 특히 흑도자에 대한 관심이 깊다. 흑도자는 우리나라 전통의 한 종류로 발전 가능성이 큰 자기이기도 해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크다. 이보다 외로운 싸움은 없다고 했지만, 이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을 거라고 말하는 이명장. 흙으로 구슬을 빚던 그 손으로 지금도 흙을 만진다는 이 명장의 눈이 여전히 빛난다.
약력
1977 故 봉계 김재석 선생 사사
2007 경남도 도자기공예 부문 최고장인 선정
2010 명지대학교 도자기기술학과 수료
2010 미국 샌프란시스코 박물관 및 대한민국 국회 작품 소장
2012 도자기공예기능사 취득
2016 우수숙련기술자 선정
2020 대한민국 명장(도예)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