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땀, 한 땀,아름다움 그 이상의 가치를 꿰매다
    대한민국명장(한복 부문) 정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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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순 명장에게 한복이란 운명이었다.
남달리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배웠던 바느질은 그를 한복이라는 세상으로 인도했다.
2019년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되면서 한층 더 묵직한 사명감을 얹게 된 그.
48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복을 짓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정인순 명장을 만났다.
 


1974 한복을 업으로 삼겠다고 결심
1975 대흥주단 견습생 발탁
1980 결혼, 일과 자녀양육 병행
1982 아리당주단 창업
1993 출토복식 연구 시작
1997 우리 혼, 우리 멋, 우리 유산 전시
1998 노력 끝에 아리랑주단 자리 인수
2015 본격적인 출토복식 연구
2017 광주공예명장(한복) 선정/우수숙련기술자(고용노동부) 선정
2018 궁중복식 전시회
2019 대한민국 명장 선정
 

대를 이은 손재주를 물려 받다
정인순 명장은 전남 보성군 출신이다. 고개만 들면 너른 평야, 둥싯 솟아오른 산자락들이 눈에 보이던 어린 시절, 명장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늘 어머니를 바라봤다. 솜씨 뛰어난 어머니의 손에는 늘 고운 색의 옷감과 바늘이 춤을 추고 있었다.

어머니가 외출하신 어느 날, 장롱을 열고 까치발을 한 채 원단을 꺼내든 명장은 본지를 놓고 그대로 재단을 해서 손바느질로 옷을 만들어냈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단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이 명장의 집 마당에 있었던 덕에 노상 안마당에는 동네아주머니들이 찾아들었는데 어머니는 늘 둘째 딸의 야무진 바느질 솜씨를 자랑했고, 명장은 그때의 뿌듯하고 우쭐했던 기분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명장이 19살이 되던 해, 당시 여자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미용, 양재 그리고 한복이었다. 손으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신이 있었기에 어느 것을 선택해도 무방했을 테지만, 미용은 온종일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고, 양재는 이미 포화상태로 보였다.

결국 어린 마음에 선택한 게 한복이었다. 이왕이면 큰 곳에서 한복을 배우자고 생각하고 광주로 올라와 한복학원을 다닌 뒤 ‘대흥주단’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정양’으로 불리던 그 시절, 그는 남다른 부지런함과 빠른 손놀림, 근면성실한 태도로 금세 주인의 눈에 들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를 찾는 단골도 빠르게 늘었다.
 

출토복식에 빠지다, 출토복식에서 배우다
그가 한복거리로 유명했던 충장로 거리에서 유명세를 탄건 당시 유행하던 빌로도(벨벳, velet) 한복 덕분이었다. 독일산 빌로도는 당시 내로라하는 집의 안방마님들이 한두 벌씩은 꼭 갖고 있는 한복이었는데 만들기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던 탓이다.

“빌로도는 원단 털이 길어서 미싱질을 하면 천이 웁니다. 그런데 ‘정양’이 만드는 빌로도 한복은 울지 않는다고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은 웃돈까지 얹어주면서 줄을 섰죠. 방법이요? 위에서 먼저 박아 안으로 넘기면 되는 거였어요(웃음). 제 스승이었던 대흥주단의 사장님께서는 떡잎부터 달랐던 아이라고 지금도 종종 말씀하십니다.”
 


그로부터 9년 뒤, 결혼을 한 그는 독립해 지금의 아리랑주단을 차렸다. 남부럽지 않게 사업을 키웠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는 1994년도부터 출토복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서울과 광주를 오기며 우리나라 출토유물의 최고 권위자인 석주선 박사에게 1년간 사사했고 2009년부터는 건국대 디자인대학원 침선전문가과정에 입학해 이상은 교수의 지도하에 400년 된 출토유물을 함께 복원했다.

“출토복을 만날 때마다 그 만듦새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쉽게 헤지는 부분, 겨드랑이 부분에는 바이어스가 덧대어있고, 바느질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한지 보면 볼수록 탄복이 나옵니다. 미학적으로도 실용적으로도 완벽한 거지요.”

아름다운 우리 한복, 영원하길
명장의 대열에 합류한 그이지만 사고방식은 매우 유연하다. 궁궐 근처에 난립하며 국적불명이라 비판 받는 한복조차도 그 출발을 소중히 여긴다. 화려하고 예쁜 한복에 열광하는 젊은 층과 외국인들이 이를 시작으로 전통한복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바로 명장의 몫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우수숙련기술자, 광주공예명장을 거쳐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까지 그의 길은 이렇게 이어져왔다.

“명장 심사를 받을 때 김덕용 장군의 모시천립을 1/2 축소해서 만드는 걸 보여드렸고, 출토유물에서 배운 간접고름도 선보였습니다. 제가 재연한 출토복식에 대해 많이 물어보셨는데 막힘없이 설명을 했던 것에 실력을 인정받은 것 같습니다.”
 

명장은 단 두 번의 도전만에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뒤 무거워진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낀다고 했다. 아름답고 고아한, 삶의 지혜와 과학이 녹아있는 전통복식을 대대손손 물려주는 것은 혼과 역사를 물려주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꾸준히 닦아왔던 기술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전수해 우리 한복 보급에 전력을 다하고 싶습니다.”

수백 년 출토복식에서 얻은 지혜를 현대 한복에 접목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우리 전통옷의 미래를 그리는 그는 비할 데 없이 깊고 아름다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쪽빛’ 바다에서 오늘도 유영하는 중이었다.
 


한복 명장이 되기 위한 조건
사랑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뛰어넘을 수 있다. 출토한복이 나오면 어디고 달려가는 열정, 손님에 따라 느낌과 분위기에 맞는 옷을 짓는 것, 후진들을 가르치는 것 모두 한복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힘든 일이다.

끈기
처음 한복을 배울 때는 깃을 다는 것부터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지만, 그 시간을 이겨내고 나면 모든 것은 자연스럽고 편안해진다. 그리고 기술 이상의 뭔가를 얹을 힘과 의욕이 생긴다.

몰입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 한복을 만들면 그 결과물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 한복은 내 마음을 그대로 투영하고 반영하기 때문이다. 옷감과 바늘을 든 순간 온전히 몰입하고 빠져들어야 한다.
 

업데이트 2020-02-1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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