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공예 외길인생, 지금도 나의 도전은 계속된다
    제53회 전국기능경기대회 참가자 임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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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열넷,
석공예의 길로 들어서다

나는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초등학교는 졸업했지만 6,400원이라는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어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때는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모습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내 모습이 창피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원망하진 않았다. 남의집살이하면서 홀로 자식들을 키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원망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 당시 어머니는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한 ‘제일석재’라는 곳에서 일꾼들에게 밥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기술 배우기를 권유했고, 1975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석공예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 조각을 배워 빨리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또 돈을 벌어 어머니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14세의 작은 몸으로는 쇠망치도 마음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렇게 내가 처음 배우기 시작한 일은 돌에 글을 새기는 ‘각자’ 기술이었다.

갈림길에서 선택한 배움
옛날에는 기술을 배우려면 3년 동안의 무일푼, 무보수의 기간을 거쳐야 했다. 보수 없이 일하며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도 수없이 많았지만, 조각을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버티고 또 버텼다. 3년 동안의 기술연마 후, 나는 김삼덕 명인의 자제인 김부응 씨의 제자로 들어갔다. 옛 시절 기술자들은 특유의 까칠함이 있어 제자 시절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기도 했다. 어머니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아 밖에 나가 소리 지르며 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노고에 비하면 내가 겪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되뇌었다.
 

 

그렇게 참고 또 참아 3년의 제자 생활을 마쳤다. 하지만 아직도 나의 기술은 형편없었다. 지방에서만큼은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 당시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돈을 바로 버느냐 기술을 더 배우냐의 갈림길이었다. 나는 고뇌끝에 조각을 더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고, 여러 명의 조각가를 만나면서 깨달은 사실은 조각에는 배움의 끝이 없다는 것이었다.

석공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1987년도에는 서울에서 전라북도 고창으로 내려와 석재공장을 운영했다. 이후 1999년 3월에는 전라남도에 정착했다. 전라남도 석공예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현재까지 후배 석공예 기능인을 선발하고, 선수들에게 관련 자료와 공구 지식 등을 전달하며 전라남도가 석공예 맥을 이어오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러면서도 2006년부터는 전라남도 지방기능경기대회와 전국대회에 참가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참가한 대회 횟수만 26번이다.

다른 직종도 저마다의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특히 석공예는 돌 재료 준비, 공구 준비 등 여러 방면에서 조건이 열악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 도에 꼭 금메달을 안겨주고 싶다는 바람은 석공예만 바라보고 살아온 나의 생에 작은 소망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지도교사와 심사위원들이 선수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의 아들 태희는 나를 이어 석공예기술을 연마 중이다. 그만큼 이 분야에 내가 느끼는 책임감이 크다. 나는 내 생이 끝날 때까지 전라남도 석공예 기능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은 어머니의 흉상이다. 8남매를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건강하게 키워준 것에 감사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나를 석공예의 길로 이끌어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이 글을 전한다. 

업데이트 2018-11-30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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