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재상의 자리에 있는 동안 검소했고 뇌물을 주려는 자를 꾸짖었으며 청렴함을 공직자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인조는 그의 안부가 궁금하여 승지를 보내 살펴보라고 했다.
실록에 따르면 임금이 승지를 보내 그의 안부를 묻게하면서 “그의 기력은 어떻고, 사는 집은 어떠한지 자세히 알고 싶으니 일일이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명했다. 승지가 아뢰기를 “그는 이미 극도로 쇠약해져 기력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돌아앉거나 누울 때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사는 집은 몇 칸 초옥(草屋)에 불과해 바람과 비조차도 가리지 못했습니다.
대를 이어 선영 아래에 살면서도 한 두락의 밭도 없고 두어 명의 노비도 없이 온 식구가 월봉(月俸)으로 입에 풀칠한다고 합니다.” 인조가말하기를 “40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면서 몇 칸 초옥(草屋)에 살며 바람과 비조차도 가리지 못하다니, 그의 청백한 삶은 이전에 없던 일이다.
내 평소 그를 우러러보았던 것은 그의 공덕(功德)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깨끗하고 검소한 삶을 모든 관료가 본받는다면 백성이 곤궁할까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의 검소한 덕행을 높이 표창하여 드러내지 않을 수 없구나. 해당 도(道)에 명하여 정당(正堂)을 지어주고 해당 관아가 무명 이불과 흰 명주 요를 짜주어서 그의 드높은 정신이 이어지게 하라.”고 했다.
시, 문장 그리고 음악을 즐겼으며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그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이라는 관직에도 불구하고 오직 녹미(祿米)만으로 생활을 하는 청백리로 가난했다. 한 대감이 어느 비 오는 날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를 본 그 대감은 속으로 놀라며 ‘세상에, 한 나라의 정승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초라할 수가….’ 집안으로 들어가니 여기저기 빗물 새는 소리가 요란했고, 그와 부인은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그릇을 가져다 놓기에 바빴다.
그 대감은 눈시울을 적시며 말을 제대로 잊지 못했다. “대감께서는 어찌 이처럼 비가 새는 초라한 집에서...” 말을 잇지 못하자 “허허,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이런 집조차 없는 백성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시오. 그런 생각을 하면 내 나라의 벼슬아치로서 부끄럽소. 나야 그에 비하면 호강 아니오?”라고 했다 한다.
위의 이야기는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이며 명재상이었던 오리 이원익과 감사원에서 선정한 조선의 3대 청백리 중 한 분인 맹사성의 이야기다.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에서 누구를 이들과 견주어 볼 수 있을까? 명심보감 치정편에 나오는 공직자가 지켜야 할 세가지 법인 ‘청렴, 신중, 근면’을 명심하고 처신하는 공직자가 물론 더 많겠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국민의 기억 속 공직자의 청렴은 아쉬운 점이 많다. 며칠 전에도 일간지에는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위장 전입 청문회’ 기사가 실렸다.
생활을 전적으로 친정어머니에게 의존하여 모른다는 후보자의 회피성 답변과 “어머니가 연로하셔서 기억을 잘 못 하신다.”는 변명은 고위공직자 청문회에서 국민들이 늘 들어야 하는 답변이 된지 오래다. 정의롭고도 정의로워야할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운계약서 작성 의혹’에 대해선 인정한다, 사죄한다, 세금 누락분에 대해 국세청에 문의해 납부할 용의가 있고, 불가능하다면 사회단체에 기부하겠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라면 어떻게 될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이라는 재물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이라는 명예를 남겨야 한다. 공직자들은 부와 명예 중 명예를 선택한 사람이다. 대부분 공직자가 청렴을 실천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본보기가 되어야 할 고위 공직자의 청렴이 공직자 전체의 청렴을 좌우하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가을, 푸른 하늘을 바라보듯 존경받는 공직자들로 가득한 대한민국을 기대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정직하게, 다 함께 투명하게 청렴을 실천하여야 한다. 잘못된 유혹에 빠지는 내 동료, 내 상사를 위하여 그들이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내어 청렴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청렴한 공직자’의 길이 어렵고 힘들 때 오리 이원익과 고불 맹사성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