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 흔적을 찾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DNA 어디인가에 ‘녹색=자연’이라는 등식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녹색은 계절과 장소를 막론하고 환영받는다.
요즘처럼 온통 더위에 포위당하는 계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여 여름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임에도 온통 회색빛 건물에 둘러싸여 지내고 있다면, 그래서 물들 것처럼 푸른 녹색이 사무치게 그립다면 전라남도 보성으로 가자.
글·사진_정환정 여행작가
녹색의 바다에 빠지다
보성은 외진 곳이었다. 군내에서 가장 큰 읍이라 할 수 있는 벌교가 교통의 요충지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인 것 외에는 이렇다할 자랑거리가 없었다. 아니, 어떤 것이 자랑거리인지 스스로 찾아내질 못했다. “주먹 자랑 하면 안 되는 곳”이라는 타이틀은, 우스갯소리일 뿐 자랑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TV광고와 드라마, 영화속 배경으로 보성의 녹차밭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지금 보성은, 매년 5월 초순부터 여름까지 전국에서 가장 북적이는 고장이다.
보성이 전라남도뿐 아니라 대한민국 관광 일번지가 되게 한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녹차밭은 대한다원에서 운영하는 사유지. 굳이 따지고 들자면 낯선 사람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아도 아무런 불평을 할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워낙 널리 알려지다 보니 누구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되었는데, 이제는 한국으로 관광을 온 외국인도 꼭 한 번은 들를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제1다원으로만 몰리는 경향이 있는데,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는 넓은 대지에 시리도록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제2다원이 더 좋다. 특히 양 옆으로 펼쳐진 녹차밭 한가운데를 걷고 있노라면 마치 푸른 물결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그 유명한 대한다업의 녹차밭에서 자동차로 약 15분 정도 떨어진 제2다원에서는, 조금 조용한 감상을 갖게 된다. 특히 조금 무리(?)를 해서 평일에 그곳을 방문하게 되면 그야말로 고요한 초록파도 한가운데를 혼자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정도로 평온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둥그스름한 녹차 나무들이 물결을 만들고 있는 녹차밭과 언제까지나 그 안에서 맴돌고 있을것 같은 낮은 구름들, 그 아래에서 허리를 숙이고 고단한 모습으로 마지막 녹차잎을 따내고 있는 사람들의 구부러진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진다.
뿐만 아니라 녹차밭의 둘레를 따라 걷다 보면 늦게까지 열매를 맺은 산딸기가 이곳저곳 빨갛게 익은 얼굴을 빼꼼히 내놓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어쩌면 싱그럽게 푸른 물결이 잔잔하게 등을 밀어 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보성에서만 만날 수 있는 ‘녹차의 맛’
하지만 이렇게 구경만 해서는 보성 녹차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기 힘든 법.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차 판매점에 무작정 들어가서 염치 불구하고 시음을 청하면 넉넉한 남도 인심 덕분에 다양한
종류의 차를 맛볼 수 있다.
녹차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주저하지는 말자. 처음 마실 때는 그저 쓴맛이던 차가 어느 순간부터 쌉쌀한 맛으로 바뀌면서 그 뒤에숨어 있던 고소하고 시고 달기까지 한 맛을 찾아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으니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보성에서는 녹차의 활용 범위가 단지 음용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해수 녹차탕에서 녹차의 진가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하고 있다. 바다와 면하고 있는 고장에서 해수탕을 운영하는 일이야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미네랄이 풍부한 청정 해수에 녹차를 우려낸 해수 녹차탕은 오직 보성에서만 만날 수 있는 명물 중의 명물이다.
해수에 우려낸 녹차는 각질 제거와 모발 관리, 비듬 예방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여 일 년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뜨끈한 물에 몸을 풀고 나면 배가 고파지는 법. 그럴 때면 보성시내 음식점 간판 중 ‘녹돈(綠豚)’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잘 들어온다.
녹차를 먹인 돼지라는 뜻인데, 한 번 맛을 들이면 일반 돼지고기는 누린내와 퍽퍽한 식감 때문에 멀리 하게 될 정도로 그 맛이 깔끔하고 육질이 부드럽다. 구울 때 배출되는 기름의 빛깔 역시 투명에 가까워 돼지 특유의 냄새 때문에 삼겹살을 멀리하던 사람도 얼마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비록 고기 굽는 냄새가 깨끗이 목욕한 몸에 다시 스며들긴 하겠지만, 보성에서 불어오는 녹색바람을 조금만 더 맞는다면 금세 지워지지 않을까. 거기는 온통 푸른색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