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정비 기술은 형편상 선택한 길이었지만, 오랜 시간 전력을 쏟을 만큼 그에게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늘 되뇌는 말, ‘한길을 걷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
그것을 스스로 증명해낸 인물, 한국폴리텍대학 서울정수캠퍼스 김관권 교수를 만났다.
글_김민정 사진_이성원
시련이 사람을 성장케 한다
기계에 손때가 묻어나듯, 명장의 삶에도 묵직한 땀방울이 내려앉았다. ‘자동차 정비기술’을 처음 마주한 때를 떠올리니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대한민국 명장(자동차정비 직종) 1호이자 한국폴리텍대학 자동차학과 김관권 교수. 그 칭호를 얻기까지 그는 젊은 시절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보냈다.
열너댓 살,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 대신 선택한 곳이 삼영자동차정비소였다. 아버지를 따라 처음 간 곳에서 그날부로 기술을 배웠다. 돈을 벌어야 했고, 먹고 사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든, 일을 배울 때는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이력
2010 한국자동차공학회 회장상
2001 산업포장
1994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 선정
1990 고용노동부 장관상
1990 대한민국 명장(자동차정비 직종) 제1호 선정
“항상 머릿속으로 ‘나는 사장이 될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어요. 선배 정비공들이 남아서 수리를 하면, 저도 남아서 일을 배웠어요. 원래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월급이 없는데,저만 3,000원을 받았어요.(당시 버스비 25원) 꾸준히 노력했더니 어리지만 저를 믿어준 거죠, 사람들이.”
그는 밥벌이를 넘어 자동차 자체에 매료되었다. 망가진 부분을 바로잡아 제대로 굴러가는 차를 볼 때면 내심 짜릿함도 느꼈다. 다만, 일을 마친 후 손톱에 시커먼 때를 묻힌 채 종로의 어느 명문고등학교 앞을 지나는 일은 참으로 서러웠다. 그 후, 학업에 대한 갈증을 못 이겨 성동기계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모든 일과를 마치면 밤 11시.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몸이 고된 것보다 배우는 기쁨이 컸기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주경야독(晝耕夜讀)했다.
“형제만 여덟명인데, 한방을 썼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공부를 할 수 없는 환경이죠. 그래서 평일에는 기숙사에서 쪽잠을 자가며 공부하고, 주말엔 집안일을 도왔어요. 내 철척이 ‘더’예요. 졸릴 때마다 조금만 더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틴 거죠.”
비록 늦깎이 고등학생이었지만 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후, 국립중앙직업훈련원을 거쳐 1982년, 한국폴리텍대학의 모태인 정수직업전문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는 이렇다 할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이 교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국가기술자격 덕분이었다고 회상한다. 총 14개의 국가기술자격 취득, 제1회 전국자동차명장대회 금상 수상, 그리고 대한민국 명장 제1호(자동차정비 직종) 선정…. 이 모든 것은 오랜시간, 노력으로 얻은 그의 보물이다.
기술로 일군 삶, 사회로 환원하다
한국폴리텍대학 정수캠퍼스 자동차학과 교수가 된지도 36년. 이곳에는 주야간을 포함해서 한 해 약 100여 명의 학생이 입학한다. 현장실무 위주의 교육으로, 자동차 시스템정비, 차체정비 등 정비사가 지녀야 할 실무능력을 배양한다. 김 교수는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 ‘한 가지’를 꼭 가르친다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20년’이 지나야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난다고 말해요. 저는 인생을 사는 태도를 어머니한테 배웠어요. 이 시대에 고루한 얘기일 수 있지만, ‘한 우물을 파라’고 하셨죠. 저는 군대에 가서도 편한 병과를 거절하고, 수송부로 보내달라고 할 정도였어요.(웃음)자동차를 계속 만져야 하니까.”
누구든지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적당히 멈추고자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지만 김 교수는 ‘기술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신기술을 접하고 응용한다. 자동차 메이커들이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함은 물론 끊임없이 연구결과를 내놓는다. 「내연기관」, 「과학으로 본 자동차엔진」, 「자동차디젤기관」 등 실무에 적용할 수 있는 그의 저서들이 그 노력을 증명해준다.
물론 하루 24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이 살았다는 그에게도 멈추어야 할 순간이 있었다. 1993년, 뜻하지 않은 사고로 병상에 누운 때다. 8일 만에 겨우 눈을 떴을 정도로 심각한 사고. 그래도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끝없이 재활 훈련을 한 끝에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하반신 장애를 입은 그때가 인생의 전환점이라 말한다.
“내 두 다리가 성치 않으니, 그때야 장애를 가진 분들이 보이더라고요. 아, 봉사해야겠다 싶었죠. 처음에는 장애인 주차구역을 돌면서 차량 수리에 관한 안내 종이를 끼워두었는데, 광고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다 현직에 있는 제자들이 봉사를 돕기 시작하면서 홍보가 됐죠. 무료로 차량을 수리해 드린지 벌써 20년째예요.”
일 년에 네 차례, 제자들과 지금까지 수리한 장애인 차량만 해도 3,000여 대다.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는 데서 나아가, 기술로 일군 삶을 사회에 환원하기를 바라는 김 교수. 제자들도 그 뜻을 이어갔으면 한다.
“투철한 장인정신도 좋지만 내가 가진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일에 성공하는 것이 익숙해지면 자신감이 생기듯이, 제가가르친 제자들이 남에게 베푸는 일에도 능숙한 인재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진정한 가르침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