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한 시간속으로의 여행
    전남 담양 창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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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누구도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따라, 세상 모든 것은 변해만 간다. 다만 그 변화가 서서히 이루어지는 곳은 있다.
일부러 잡아놓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은 아닌가 싶은 공간. 대나무로 유명한 담양의 창평 삼지내 마을이 바로 그런 곳이다.
글·사진_정환정 여행작가
 

 

낭만적 공간으로 한 걸음
담양은 고요한 고장이다.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곳이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곳이 아니면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이젠 잘 사용하지 않는 ‘고장’이라는 말로 담양을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행정 명칭인 ‘군’으로 표기하기에는 숱한 낭만적 장소의 아름다움이 무미건조해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담양에서 광주광역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창평은 더더욱 그러하다.

창평을 찾을 때는 우선 창평 면사무소를 목적지로 하는 게 좋다. 마을의 중심이기도 하거니와 마을이 어떤 곳인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힌트를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대들보를 올리고 기와를 얹은 면사무소라니…… 물론 서울 한복판 종로구의 주민센터 역시 한옥으로 설계하고 지어졌지만, 탁 트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기와집 관공서가 주는 개방감과 안정감은 오직 창평면사무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상.
 


면사무소와 마주한 곳에는 ‘달팽이 가게’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차와 음료를 판매한다고 되어 있지만 기척은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곳에서 움직이는 것은 나 혼자 뿐인가 싶을 정도로 사위는 고요하기만 하다. 그런 의심을 풀기 가장 좋은 곳은 바로 식당이다. 음식 맛 좋기로 유명한 남도인데다, 창평은 광주에서도 식사를 위해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국밥 때문인데, 실제 광주광역시에는 ‘창평’이라는 이름을 간판에 새겨 넣은 국밥집이 적지 않다.
 


식당에 들어가 국밥을 시키면, 건더기가 가득 담긴 뚝배기가 금방 나온다. 특이한 점은 국물이 맑다는 것. 투명한 국물만큼이나 맛도 깔끔하다. 수많은 내장을 고아낸 국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식성에 맞게 양념을 풀고 새우젓으로 간을 하면 그걸로 본격적인 식사 준비가 끝난다. 딱 먹기좋은 온도로 토렴을 해낸 국밥을 넉넉한 마음으로 먹으면 된다. 그러는 사이에 본격적인 점심시간. 식당 안이 북적거리게 돼도 무슨 상관인가. 뚝배기 한 그릇 덕분에 무아지경이 펼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담장 위에 쌓인 ‘그것’
담양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창평 삼지내 마을은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은 곳이다. 백제 시대 때 형성된 마을인 이곳은 언뜻 보기엔 특별한 점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걸을 때마다 슬쩍슬쩍 저 너머가 보일것 같은 매혹적인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이곳의 분위기가 우리 몸에 익은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마을이야 어디 여기 한 곳뿐일까. 하지만 삼지내는 다르다.

이곳에서는 집집마다 여전히 하루하루의 생활이 이어지고 있고, 그 생활이 이야기처럼 켜켜이 쌓여 돌담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돌담길 옆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고 누가 보아도 당당한 얼굴의 꽃들이 소담스럽게 혹은 화려하게 피어 있다. 우뚝한 푸른 나무가 지나는 사람을 느긋한 눈길로 바라보며 한과, 엿, 막걸리, 자연 효소 등을 판매하고 있다는 간판들은 그 주인들을 닮아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고 있다. 실제 삼지내는 겨울이 되면 흰 쌀엿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세를 탄 마을이다.
 



당연히 전통방식 그대로 고두밥을 짓고 엿기름을 짜내 만든다. 주름이 잔뜩 진 할머니들의 손으로 말이다. 물론 지금은 봄이라 그런 모습을 직접 보기는 힘들지만, 혹시라도 여행 날짜에 여유가 있다면 하루 묵어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던 한옥들이 이제는 민박으로 변신해 낯선 이의 방문도 넉넉한 인심으로 환영하고 있으니 말이다.
 

창평 삼지내에서는 무엇 하나 지나치게 도드라진 것이 없으면서도 모두 정겨운 풍경이다. 비슷한 것 같지만 똑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길가에 핀 꽃들도, 담장을 오르는 덩굴도, 골목을 따라 흐르는 물도 이곳에서 그리고 저곳에서 모두 다른 모습이다. 물론 한 눈에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혹은 잠시 멈추어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그 차이를 알수 있다. 마침내 그 다채로운 모습들을 발견하고 거기에 마음을 뺏기고 나면, 발걸음은 저절로 느려지고 쫓기는 생활에 익숙해진 호흡은 비로소 한숨을 돌리게 된다. 우리 모두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푸른 느림의 미학이, 바로 그곳 창평 삼지내 마을에서 무엇인지도 모를 무언가에 쫓기느라 지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업데이트 2018-06-2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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