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만든 38년 주물(鑄物) 장인 - ‘공간미술’ 박상규 대표
    6월 ‘이달의 기능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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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기능한국인 수상자 공간미술의 박상규 대표는 40여 년간 금속 조형물 제작이라는 한 우물을 파온 숙련기술인으로 끊임없는 시설개선 투자와 장인정신으로 전국에 1만개 이상의 조형물을 제작‧설치하며 해외 수출까지도 하고 있는 국내의 대표적인 주물 장인이다.  

박 대표는 조형물을 제작할 수 있는 젊은 장인들을 양성하고 우리나라의 조형물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경기도 안성에 주물 작품 전시관을 조성 중이다. 


사촌형의 주물 작업장에서 주물과 인연 맺어
 

농사를 짓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박상규 대표는 공부보다는 놀기 좋아하는 학생이었고 집안 환경도 어려운 탓에 일찌감치 취업을 결심했다. 특히 주물 사업을 하고 있었던 사촌형의 영향을 받아 중학교 3학년 때 주물을 배우기로 진로를 결정하고 순천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때 사촌형님이 운영하시던 주물 작업장에서 진흙으로 만든 주물 틀에 빨간 쇳물을 부어 조형물을 제조하는 과정을 보고 정말 신기하고 흥미로웠습니다. 거의 날마다 그 공장을 찾아가 조형물 제작모습을 지켜보는 게 저의 즐거움이었어요.”


순천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진학한 박 대표는 설계, 제도, 판금, 선반, 용접, 주물 등 기계 분야의 기본 과정을 모두 배우고 2학년 2학기 때 주물반에 들어가 전공으로 주물 기술을 연마했다. 순천공고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주)일진이라는 기업에 입사했다. 알루미늄을 녹여 창틀에 쓰는 새시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 박 대표는 그 곳에서 꽤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주)일진에서 일하던 중 전기 금속 재료를 만드는 대기업에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기업에 들어가 일했지만 자신의 능력과 뜻을 펼칠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두고 나왔다. 대기업에서 나와 잠시 쉬고 있던 그에게 찾아온 사람은 주물 작업장을 운영하던 사촌형이었다. 사촌형이 같이 일해보자고 그에게 제안한 것이다. 두 달 정도 고민한 끝에 사촌형의 주물회사인 동신미술에 들어간 박 대표는 10년 안에 세계적인 조형물 제조회사로 키우고 싶다며 사촌형에게 적극적인 시설투자를 제안했고 사촌형은 그와 뜻을 같이 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당시 주물 공장은 제조 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거의 수작업으로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이대로는 제대로 된 조형물을 제작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먼저 번듯한 공장이 있어야 했다. 박 대표는 4,000여 평의 부지를 구입해 공장을 새로 지었다. 조형물 제작에 필수적인 최신 시설을 도입하고 연구실도 만들었다. 시설개선에만 약 3억원을 투자했다. 직원도 정규직으로 뽑았다. 

  사촌형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경쟁력 있는 제작시스템을 갖춘 그는 약 7년 동안 사촌형과 일하며 사업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사촌형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회사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박 대표가 조형물 스쿨 설립 등 회사의 미래를 위해 생각했던 계획들은 사촌형이 사망한 후 추진동력이 상실됐다. 결국 동신미술을 나와 전국의 조형물 작업장을 돌아다니며 일을 해야 했다.
 

300만원으로 창업, 두 번이나 쫓겨나며 공장 이전…대형 교통사고까지 당해

그 때 가깝게 지내던 한 대학 교수가 그의 실력을 아깝게 여기고 “실력이 녹슬기 전에 작더라도 네 작업장을 만들어보라”라는 조언에 용기를 얻은 박 대표는 지난 2000년 수중에 있던 300만원으로 아내와 함께 창업을 했다.


“경기도 김포의 150평짜리 돼지 막사를 월세로 빌렸어요. 압축기 같은 장비는 어디서 얻어가지고 와 수리했고 가마는 벽돌하고 용접기, 산소통 사다가 직접 만들었어요. 공장 구석에 부부가 묵을 천막방을 만들고 전기장판을 깔았습니다. 처음엔 직원 없이 아내와 단 둘이 시작했죠. 조형물 제조 의뢰가 오면 재료비를 미리 좀 달라고 해서 재료를 직접 사다가 만들어 납품하곤 했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며 일감을 수주하기 위해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납기를 맞추기 위해 아내와 밤새도록 일을 했다. 창업 후 약 5년 동안 하루에 4시간 이상 전 적이 없을 정도로 일에 매달렸다. 그에게 창업을 권한 교수가 흉상 제작을 의뢰하는 등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이어졌다. 주문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직원도 채용하고 공장 환경도 조금씩 개선했다.


그런데 창업 후 1년 6개월 정도 지나 김포 공장이 군사보호지역 안에 있는 불법 건축물이라는 이유로 당장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마침 김포에 있는 한 지인이 빈 창고를 쓰라고 해서 이왕이면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3,000만원의 빚을 얻어 허름한 창고를 이전 공장보다 크게 개선된 공장으로 변모시키고 다시 일에 매진했다. 직원도 5명에서 10명으로 불어났다. 창업 후 5년 정도 지나니 사업체계도 어느 정도 잡히고 주물업계에선 제법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에게 또 한 번 불운이 닥쳤다.
 

“창업 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될 만하니까 김포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또 다시 쫓겨나갈 상황에 처하게 됐어요. 더 이상 쫓겨나지 않고 안정적으로 정착해서 조형물을 만들 수 있는 곳에 공장을 제대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 대표는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에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공장을 새롭게 지었다. 2008년 김포 공장을 정리하고 이천 공장으로 이전한 박 대표는 당시 90% 이상의 주물 작업장이 무허가 상태에서 운영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공장등록과 환경영향평가 등의 법적 절차를 준수하고 일반 주조부, 정밀 주조부, 스테인리스부 등의 부서와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춘 공장을 지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박 대표가 지금까지 전국에 제작한 조형물은 1만개를 넘는다. 국내 최대 입상인 장보고 동상(완도) 및 국내 최대 높이(22m)의 현대 조각 작품인 청동 다리 조형물(김천 혁신도시), 국내의 중심부인 광화문의 세종대왕상, 국회의사당 내부 홀에 있는 제헌국회의원 198명의 청동 부조, 국회의사당 국회의장석 뒤편에 붙어 있는 국회 상징 로고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보수하기도 했다. 
 

박 대표는 김천 혁신도시 청동 다리 조형물 제작 시에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공사현장을 가던 도중 한 승용차가 뒤에서 들이 받은 박 대표의 차가 30m 정도 날아가 떨어져 쇄골이 부러지는 등 외관상 60% 이상이 손상된 대형 사고였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온 몸에 깁스를 하고 지냈지만 회사가 걱정이었다.
 

“몇 개월 병원에 있는 동안 직원 월급도 못 주고 죽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는지 수금도 잘 안됐어요.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이대로 놔두면 그동안 어렵게 일궈온 회사가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4개월 정도 지나니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됐지만 의사들은 1년 정도는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5개월 만에 병원을 나와  회사를 정상화 시키고 조형물 제작에 다시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장인 양성 및 조형물 세계화 꿈꾸다

박 대표가 제작한 조형물은 해외에서도 볼 수 있다. 영국 벨파스트 항구에 높이 12m짜리 해마상이 있다. 서울대학교 교환교수로 오게 된 한 교수를 알게 됐는데 그 교수의 작품을 스테인리스로 만들어 이 항구에 설치한 것이다. 또 북경, 상하이 등 중국 각지에 말 동상 50개를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그는 해외수출 시 철저하게 국내에서 조형물을 만든 후 해외로 보내는 방식을 추구한다. 해외 현지에서 제작하면 자신이 평생 일궈놓은 기술이 해외로 유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 대학과 건설회사에서 공장을 차려줄 테니 중국에 와서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어요. 연봉 3억원에 작품마다 일정액의 개런티를 보장하고 가족 체류비용까지 보장하겠다는 조건도 있었고요. 고민을 좀 했는데 거절했어요. 돈을 벌기보다는 제 기술을 지키고 싶었죠. 또 우리나라 고유의 조형물 제조 기술을 젊은 장인들에게 전수하고 전 세계에 우리의 조형물을 널리 알리고 싶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요”  
 
박 대표는 장기 계획으로 경기도 안성에 1만4,000평 규모의 주물 작품 전시관을 조성 중이다. 그동안 모아놓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교육관, 체험관, 연구관 등도 만들어 젊은 장인들을 양성하는 것은 물론 외국인들을 불러 우리나라 주물 예술을 보여주며 조형물 수출의 장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그는 조형물을 단순히 쇠로 만든 제품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쇳물 아티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형물 디자인을 쇠로 구현하는 주물 작업에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금속 조형물은 아무리 디자인과 설계가 좋아도 주물이 나쁘면 작품 가치를 잃게 돼요. 작품의 생명을 결정하는 작업이 주물입니다. 한국적이고 품위 있고 세세한 부분까지 형상화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몇 백 년이 지나도 국보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형물을 만드는 게 저의 꿈입니다.”
 

박 대표는 매년 직업기술학교에서 사회 초년생들을 데려와 직원으로 채용해 조형물 제조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대구카톨릭대학교, 운봉공업고등학교와 산학협력을 체결하고 기술 지원도 하고 있다. 또한 지역에 아름다움을 기증한다는 생각으로 학교, 길거리, 저수지 등에 조형물을 세워 지역주민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조형물 제작업계에선 직원들의 임금이 가장 높고 정규직을 채용할 정도로 직원들의 복지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제가 그랬듯이 한 분야에 재미를 느끼고 매진하다보면 되더라고요. 그리고 대기업 취업만 생각하지 말고 사회나 부모를 원망하지 마세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분야에 재미를 느끼고 끈기 있게 하다보면 실력을 인정받으며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업데이트 2017-06-2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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