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년 침선의 길, 명장에 오르다
    이영숙 - 대한민국 한복명장
  • 1761    

유씨 부인은 조침문(弔針文)에서 이렇게 읊었다.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너는 미묘한 품질과 특별한 재치를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철중(鐵中)의 쟁쟁(錚錚)이라.”

유씨부인처럼 제 손의 바늘을 평생의 벗으로 여긴 이가 있다.
40여 년의 우직함으로 명장의 반열에 오른 이영숙 제9대 대한민국 한복명장이 그 주인공이다.



침선針線이라는 오묘하고 귀한 재주

이영숙 명장은 지난 2012년, 대한민국 한복명장에 아홉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40여 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노력해 6번의 도전으로 일구어낸 값진 이름이었다. 대한민국 최연소 한복명장이자 울산 최초의 공예명장이 된 그는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수상, 침선장 수상, 명인 대상 등 60여 차례의 수상경력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평생 침선을 해오신 어머니의 맥을 이어가며 딸에게도 대를 물릴 수 있어 명장에게 침선(針線)이란 참으로 오묘하고 귀한 재주다. 그는 한복 중에서도 전통복식에 매료되어 40년 째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 명장은 구청공무원으로 일하며 공무원 남편을 만나 평범한 가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운명일까. 명장은 결혼 후에 자연스레 일을 놓게 되었고, 그때 어머니 어깨 너머로 보던 바늘을 직접 손에 쥐었다.
“어릴 적부터 바늘은 너무나도 익숙한 도구였어요. 어머니 어깨 너머로 깃이 뭔지 동정이 뭔지 고름이 뭔지를 늘 접하며 큰 거지요. 거기다 어머니를 닮아 손으로 하는 일은 뭐든지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봉제공장에서 일감을 가져와 뜨개질을 하고 서면 복개시장에 수를 놓아 팔기도 했다.
1970년대 한복이 전성시대를 맞이하면서 일감이 더욱 늘어났다. 돌이켜보면, 공무원으로 일할 시절에도 항상 수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양은 업무가 그렇게 바쁜데도 수까지 놓아? 거참 대단하다!” 동료들의 우스갯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공직생활을 계속했다면 취미로 남았을 지도 모를 바느질이 그렇게 명장의 인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침선기술, 기록으로 남기다

명장의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동인 그를 바느질로 키웠다. 어린 시절, 한복 짓는 어머니 옆에서 “엄마, 대충이 얼마야?”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대충 어림짐작으로 하는 거지” 하시곤 했다. 어머니의 기술은 훌륭했지만 그저 구전으로 전수되어 오는 것들이었다. 그때부터 명장은 기술들을 하나둘 기록하기 시작했다. 시대가 지나고 보니 그 기록이 가르침이 되었고, 배우는 이들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그 말이 참 무거웠어요.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내실을 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지요. 울산에서 일을 하다가도 오후 4시가 되면 대구로 가서 패션디자인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명장은 원광디지털대학교 한국복식과학과에서 4년제 학위를 취득했다. 세탁기능사, 양복기능사, 자수기능사(수/자수) 등 취득한 자격증만 해도 15개가 넘는다. 그가 배움에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가르침에도 철학이 있다고 했다. 배우는 이들의 책상 위에는 따로 교재가 없다는 것.
“오늘 교재를 주면 내일은 그것이 구(舊)기술이 되지요. 나도 한없이 달라지는데 그걸 교재로 만들어 준다면 발전이 없겠지요. 다만, 내가 없을 때에도 누군가는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항상 기록을 해둡니다. 나머지는 그때마다 배우는 사람 각자의 몫입니다.”
어떠한 철학이든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한복을 만드는 일일 터, 명장에게 가장 좋은 한복이 무어냐고 물었다.
“한복을 입는 사람을 이해하면 쉽지요. 어떤 체형과 피부색을 가졌는지, 어떤 용도로 한복을 입고자하는 지를 봅니다. 그런 다음에 옷감과 배색, 계절을 잘 살린다면 가장 좋은 한복이 되겠지요.”
이영숙 명장에게 좋은 옷은 계측을 하고 재도를 한 뒤에 재단과 봉제에 들어가는 기본적인 원리를 잘 따른 옷이다. 어머니의 기술에 정확성을 더했듯이 기본에 충실한 것이 곧 최선이라는 것이다.


한 분야에서 뜻을 이루는 일은 누구에게나 험난하다

어느덧 60대의 삶을 살고 있는 이영숙 명장. 그는 청년들이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그저 어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젊은이들을 만나면 다들 꿈이라는 게 있어요. 물론,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말도 못하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저 또한 명장이 되기 위해 6번의 도전을 했고, 신념을 굽히지 않고 걸었기에 2012년 목표한 바를 이루게 된 거지요.”
그는 어린 시절의 경험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여고생 시절, 명장은 부산의 청학동, 대신동, 범천동 일대 산꼭대기의 집들을 돌아다니며 친구와 연필을 팔았다고 했다. 하나에 3원하는 연필을 10원에 판 매해 7원의 마진을 남기며 스스로 용돈을 벌었다.
그때 그 시절은 명장에게 값진 삶의 보약이 되었다.
이렇듯 어려움을 끝까지 견뎌 낸 기억은 살아가면서 힘든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저마다의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삶이라는 명장은 자신만의 목표를 끝까지 이루는 것, 그것이 곧 성공이라고 말했다. 한복을 짓고 난 뒤의 자투리 천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는 명장의 말에서 자신의 길에 대한 묵직한 애정이 묻어났다.

 

대한민국 침선명장으로서의 또 다른 길

다시 태어나도 한복을 짓겠다는 명장의 말에 17년째 명장의 뒤를 잇고 있는 딸 이정현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이내, 딸이자 제자로서 그의 열정에 존경을 표한다. 딸이 제 전공을 두고 침선(針線)의 길을 택한 것에 대해 명장은 감사한 일이라고 말한다. 기술은 이처럼 대를 잇는 체계가 대부분이지만, 그것은 기술 전수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명장은 지난 2010년부터 전수관(한복패션전문학원)을 열어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한복 짓는 일에 매료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나날이 새로운 기술을 전수하는 기쁨은 정말로 값진 일이다.
“나는 서서 배우는 사람이고, 그들은 앉아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세 사람이 모이면 한 사람이 스승이 된다는 말처럼,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가르치고 배우기 때문에 평생이 학습이지요.”
대한민국 한복명장으로서 이영숙 명장은 앞으로도 이룰 것이 많다. 그는 한복의 또 다른 도전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꿈을 이루는 데는 조급함이 아닌 한 길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우직함과 이렇듯 나날이 발전하고자 하는 새로움이 있었다.
“한복은 입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문화라는 것은 세대를 더할수록 그 가치를 발휘하지요. 앞으로 한복기술은 우리 문화상품이 되리라 봅니다. 대한민국 한복명장으로서 이러한 부분에 더욱 더 힘을 쏟고 싶습니다.”
업데이트 2016-01-2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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