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과 화쟁
박순환 /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 직무대행
과거 먹고 살길이 막막할 때 가장 좋은 계절이 바로 추석 무렵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오곡이 무르익으며 과일이 결실을 맺을 때라 어디를 가나 먹을 것이 풍부했다. 또 추석에는 일가친척이 고향에 모여 함께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전통이 있다. 설날보다 추석이 일가친척을 방문하거나 고향을 찾기가 적당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떠나 멀리 외지에 나가있는 자식들도 이날 부모를 찾아오는데 이를 ‘근친’이라고 한다. 추석 때는 시집을 간 딸도 친정을 찾아간다. 시집을 간 딸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친정 나들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농사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먹을 것이 풍부한 계절인 추석을 전후해 친정과 시집의 중간 지점에서 부모를 만나게 된다. 이때는 좋은 음식을 서로 준비해서 만나게 되는데 이를 ‘반보기’라고 한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고향을 떠나있던 국민 대다수가 고향을 방문한다. 이 때문에 전국 고속도로가 정체되고 열차와 고속버스가 매진되는 민족 대이동현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기다리는 추석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여서 화목하게 지내는 날이 왜 반갑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이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도 분명히 있다.
추석 때 어른들이 다 모이게 되면 젊은이들은 좋든 싫든 들어야 하는 말이 있다. 성적, 진학, 취업, 결혼, 출산 등이다. 기성세대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속에 갇혀있는 것 같은 풀리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추석 연휴에만 맞닥뜨리는 일가친척으로부터 듣는 이야기라고 치부하면 여기까지는 나은 편이다. 그 같은 일은 누구나 겪는 일이고 “괜찮아, 조금만 참으면 추석도 끝이야, 그러면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추석을 보낼 수 있다.
가장 심각한 상황은 이혼을 비롯한 가정불화를 겪고 있는 집이 추석을 맞이했을 경우다. 평소에도 자주 부딪히는 배우자들은 서로가 꼴도 보기 싫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갈등을 겪으며 친척들과 추석을 보내게 된다. 그 부모 밑에 있는 아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모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 게다가 부모의 분노가 아이를 향할 때도 있어 아이는 이유도 없이 폭행을 당하거나 갖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싸움이 단순히 한 집안의 불화에만 그치지 않고 친척들과의 불화에도 해당된다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상상하기도 어려운 풍경이 펼쳐진다. 갈수록 점점 이기주의가 심화되는 사회에서 더 이상 가족이 옛날처럼 끈끈한 정이 있는 그런 단위가 아니라 단순히 사회적 통계를 셀 때 최소한의 단위로 밖에 의미가 없는 듯하다.
요즈음 아침에 신문을 펼치면 “왜 이리 사회가 혼란스러울까”라며 걱정부터 앞선다. 서로 합심해서 노력해도 많은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은데 가족 공동체는 물론 같은 사회 안에서도 이렇게 서로 다투고 있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법륜스님이 밝힌 사회문제를 푸는 해법은 이렇다. 가족들 간 서로 싸우고 풀지 못하는 문제들, 서로 상처받고 손해를 보면서도 풀지 못하는 현안들에 대해 그 해법의 실마리는 ‘화쟁’의 원리다. 서로 부딪히고 있는 쟁점을 조화롭게 화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미 불거져 있는 갈등만 보면 일견 서로 이기고 지는 문제 혹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편을 들어야 하는 문제 같아 보이지만 서로 공존의 토대 위에 있다는 것을 알면 갈등은 해소되고 진정한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시한다.
이번에 풍요로운 추석을 위한 화합 프로젝트를 생각해 본다. 가족 간의 화합, 사회 갈등의 화합, 남북 간의 화합을 위해 화합의 장을 만들고 오손도손 모여 한솥밥을 먹는 장면을 그려본다. 그동안 농사를 잘 되게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농사의 결실을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추석을 기다리고 ‘화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새롭게 단장해본다.